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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 궁중음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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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궁중음식 제2대 기능 보유자, 황혜성 인터뷰

♣ 궁중음식 중요무형문학재 (고)황혜성(黃 慧 性)여사 인터뷰(1996)

한국 음식의 정수(精髓) 조선조 궁중음식의 발굴과 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황혜성(黃慧性)여사는 요즘도 아침 6시에 일어나 집안 일을 보살핀 후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에 나가 그가 익힌 전통궁중음식 솜씨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9시면 어김없이 집을 나선다.

전(前)한양대와 성대 가정과 교수로 봉직하며 후배양성에도 남다른 정성을 쏟아온 황여사는 우리나라 유일의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로 중요무형문화재(38호) 이기도 하다. 1920년생으로 올해 75세이다. 곱게 차려 입은 옷 매무새와 가날픈 것 같으면서도 또랑또랑한 여사의 독특한 목소리에서 아직도 한창때의 정열과 의욕을 잃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궁중음식 황혜성(黃 慧 性)
▲ 중요무형문화재 38호 황혜성(黃慧性)

 Q. 선생님이 태어나 자라시던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일본 유학 후 대동여고 교사로

충남 천안 읍내리에서 정미소를 갖고 광작(廣作)하는 부잣집 딸로 태어났습니다. 결혼 11년만에 백일기도로 태어 난데다 열살이 되도록 동생이 없어 아버지(黃義秀)와 어머니(陳興)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어렸을 땐 어머니가 많았어요.

난엄마, 젖엄마, 어분엄마, 광덕사엄마(스님), 무당수엄마 등이 있었지요. 몸집이 작고 허약해 많은 어머니를 두어 탈없이 자라게 하려는 배려 였어요. 지금도 일곱살때 일꾼의 등에 업혀 천안보통학교에 다니던 일이 생각 납니다.

조기교육을 시켜야한다는 어머니의 배려였지만 나는 공부보다 일꾼이 먼저 가버리면 어떻게하나 하는 걱정뿐 이었어요. 공주여학교에서 2년과정을 마친(1932년)후 공주공립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그후 일본 후쿠오카지쿠시 여학교로 전입해서 졸업(1947년)한 후 곧 바로 일본 교토(京都)여자고등전문학교(현 京都여대) 가사과에 들어가 3년 과정을 마친 후 귀국(1940년)했지요.

귀국한 후 곧 대전 대동고녀(현 대전여고)선생으로 취직했습니다. 20살때의 일이지요. 당시 가르쳤던 학생 가운데 지금까지 교분이 이어지고 있는 분(朴喜違, 黃淑香)이 있는데 나이가 한살밖 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 부모님 死別, 숙명여전 전직

교사가 된 직후 큰 시련에 부딪쳤습니다. 교사로 발령된 그해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더니 다음해에 아버지가, 또 한해 후엔 어머니마저 12살 된 남동생을 남기시고 세상을 뜨셨습니다.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화초처럼 살아오던 나는 졸지에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은 어찌된 것인지 우리에게 돌아온 몫은 돈암동에 있는 집 한채 뿐이었어요.

 Q. 궁중음식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는지요.

대동여고를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있는데 뜻밖에 서울의 숙명여전(현 숙대)에서 가사과 전임강사를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숙명여전의 학장은 일본인 오다(小田省五)였습니다.

영양학자이며 조선사 연구가인 오다학장은 나에게 조선사람이 조선요리를 모르면 되겠느냐며 학생들에게 궁중음식을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평민으로서는 접근하기 힘든 창덕궁의 주방상궁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곳에서 나의 스승인 한희순(韓熙順) 주방상궁을 만나게 되었고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기를 갖게 되었지요. 그리고 1943년 중앙의료원에서 문관으로 있던 한병덕(韓炳悳)씨와 결혼했습니다.

한희순(韓熙順) 주방상궁
▲ 한희순(韓熙順) 주방상궁

♣ 낙선재 한상궁 찾아 30년 배워

당시 순종이 승하하시고 국권이 오래 전에 일제에 넘어갔지만 창덕궁 낙선재에는 순종의 계비인 윤비가 거처하고 계셔서 왕실의 법도가 살아 있었습니다. 한상궁을 낙선재 소주방(燒廚房)에서 처음 뵈었을 때의 정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스승은 두꺼운 방석을 깔고 앉아 높은 조리대에서 묵직하고 끝이 뾰족하게 올라간 큰 칼로 생선을 얇게 저미고 계셨습니다. 그때가 1942년으로 내 나이 22세 되던 해 입니다. 스승인 한상궁의 연세는 52세셨지요.

그후 한상궁이 1972년 82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30년을 거의 매일 뵙고 살아왔습니다. 한상궁은 1966년 윤비가 세상을 뜨시자 안국동 별궁을 내놓고 왕십리에 집 한채를 얻어 살게 되었는데 나도 스승을 따라 왕십리로 이사했습니다.

 Q. 한상궁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궁중음식을 전수받으셨는지요.

궁중음식을 전수받았다고 하나 음식발기(음식재료를 적은 글)를 보여주거나 글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눈동냥으로 배웠지요. 한 상궁은 워낙 솜씨가 빨라 이것저것 물어보면 음식에 침이 튀긴다고 야단치기 일쑤였어요. 그런데다 궁사람들의 말씨가 평민과 달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밥을 수라, 된장찌게를 토장조치라 하고 장아찌는 장과, 깍두기는 송송이, 조림은 조리개라 했어요. 잔치음식이나 종묘제사 때 쓰는 음식은 창경궁 장서각과 서울대 도서관에서 조선조의 각종 의궤와 찬품단자를 찾아내 학문적으로 체계화해 갔지요.

1868년 조대비육순잔치때 썼던 음식재료와 분량을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 1795년 혜경궁 홍씨가 정조와 함께 사도세자 묘원에 행차할 때 올린 음식을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전국 각지에서 궁중으로 진상한 식품의 종류와 수랑을 기록한 영조때의 『공선정례(貢膳定例)』등은 모두 내가 찾아낸 책들입니다.

도서관에서 찾아낸 자료와 스승께 배운 것을 종합해서 1957년 최초의 궁중음식 이론서인 『이조궁정요리통고(李朝宮中料理通攷)』라는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궁중음식 황혜성(黃 慧 性) 인터뷰
▲ 황혜성여사(右)는 한국의 음식물에는 특별히 정제된 비타민을 먹지않아도 될만큼 영양이 고르게 들어있다고 설명한다.

이조궁정요리통고 >

 Q. 조선조 궁중음식의 특징은 무엇인지요.

♣ 궁중음식의 특징은 조화(調和)에

조선조 궁중음식은 옛부터 내려온 역대 왕조의 음식과 조리법이 한층 발전 된 형태라 말할 수 있어요. 궁중음식은 한국음식의 정수라 말합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올려진 진상품을 기지고 조리기술이 뛰어난 전문 요리사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발전한 궁중음식은 왕족이 사대부(士大夫)가와 혈연관계를 맺게됨으로써 일반인에게 전해졌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궁중의 음식이 민가에 하사되어 널리 알려짐으로써 한국음식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플 끼쳤지요.

조선조 궁중에서는 평일의 경우 대전, 중전, 대비전, 대왕대비전에 각각 아침과 저녁의 수라상과 이른 아침의 초조반상(初朝飯床), 점심의 낮것상 등 네차례의 식사가 있었어요.

탕약을 드시지 않는 날에는 아침 7시전에 초조반상을 죽이나 미음 같은 유동음식을 기본으로 젓국찌개, 동치미, 마른 찬을 차리는 간단한 죽상을 마련했지요. 아침 수라는 10시경에, 저녁 수라는 오후5시경에 내며 낮에는 낮것상이라 하여 면상이나 다과상을 차렸어요.

수라상은 12첩 반상 차림으로 반가(班家)의 9첩이나 7첩 반상 차림보다 가지수가 많을 뿐 아니라 식사 예법도 까다로운 편이었습니다. 수라상을 12첩 반상으로 차리는데는 수라상에 오른 음식이 어느 고장의 것인지 확인하고, 그곳의 사는 형편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지요.

조선조 궁중음식의 특징이라고 하면 조화(調和)에서 찾을 수 있어요. 조선조는 주역(周易)이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요. 이것이 음식문화에도 스며 들어 음양의 조화를 생각했습니다.

육류와 야채류, 육지의 동물과 바다생선 등이 조화되게 조리를 했어요. 소고기국에 무를 사용하는 것은 음양의 조화를 생각한 것입니다. 음식을 꾸미는 오색(五色)고명 역시 천지의 조화를 음식에 담는 뜻이 있어요.

궁중음식 수라상차림
▲ 궁중음식 수라상차림

 Q. 궁중음식의 전수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고 식사법은 어떠했는지요.

역대 왕조의 궁중음식은 궁중에서 주방상궁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왔어요. 궁중의 살림은 중전의 총괄 아래 궁마다 상궁을 배치해서 처소널로 분담케했어요.

13세에 입궁한 아기 나인을 항아님이라고 하는데 10년이 지나 23세가 되면 쪽을 지고 비녀를 꽂아 관례를 올려 어른 대접을 받는 내명부(內命婦)로 품계(品階)를 합니다. 다시 10년이 지나면 상궁(尙宮)으로 봉(封)해 벼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직책에 따라 품위(品位)가 주어지게 되는데 나인(內人)은 지밀(至密)나인과 도청(都廳)나인으로 나뉘어집니다. 이중 도청나인 가운 데 소주방나인과 생과방(生果房)나인이 음식을 담당합니다.

안소주방(內燒廚房)에서는 고사(告祀), 왕자 아기씨의 백일과 탄일 음식 등 왕가 안에서의 소규모 잔치음식을 마련하게 되지요. 생과방에서는 소주방과 함께 조석(朝夕)수라 이 외의 다과(茶菓)와 전다(煎茶)를 올리며 갖가지 떡도 만들게 됩니다.

주방상궁이 되려면 13살에 입궁하여 스승을 정하고 20년간 전수를 받아 33세가 되면 주방상궁 첩지(牒紙)를 받아 평생 소주방에서 음식만드는 일을 하게 됩니다. 수라상을 올릴 때는 수라상궁 세명이 수라 잡수시는 일을 담당합니다.

이들중 가장 나이가 많은 상궁을 기미(氣朱)상궁이라 하는데 검식(檢食)을 담당하고 나머지 두분의 상궁중 한 분은 그릇의 뚜껑을 여닫는 시중을 들고 다른 한분은 전골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릇도 추석이 되면 수라상의 반상기가 은기(銀器)로 바뀌고 이듬해 단오부터 사기(砂器)로 대체됩니다.

수라상에는 수저가 두벌씩 놓여서 국물 뜨고 물갈아 먹는 숟가락이 따로 있었습니다. 궁중의 음식만드는 일에서 시중드는 일이 이렇듯 법과 절차가 있었습니다.

 Q. 선생님은 학교에서 후학도를 길러내는 일에도 많은 기여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71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광복후 숙명여대 가정과 교수로 6.25가 나던 해까지 있었어요. 그후 3년을 쉬었다가 영등포여고에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서울문리사범대 교수(59~64년), 명지대 가정과 교수(65~67년)를 거쳐 한양대 사범대 가정과 교수(67~72년)와 성대 가정과 교수(72~86년)로 정년을 맞았어요.

그러나 정규학교 교육을 통해서 보다 1971년에 설립한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을 통해 배출한 제자들이 우리 식문화전통을 이어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데 보람을 갖고 있습니다. 궁중음식연구원은 1971년 궁중음식이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은 것을 계기로 이를 보급하고 계승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Q. 따님들이 선생님의 뒤를 이어 모두 한국의 식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큰 딸 복려(福麗)는 궁중음식연구원장, 둘째딸 복선(福善)이는 요리학원원장, 막내딸 복진(福眞)이는 춘천전문대 조리과 교수로 세딸이 모두 내 뒤를 잇고 있어 정부로부터 ‘우리맛 지키기 문화가족’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큰 딸은 내가 죽은 후 중요무형문화재 38호를 이어 받을 기능보유자로 내정돼 있지요. 막내아들은 사업을 하고 있어요.

황혜성여사 가족 4남매
▲ 좌로부터 막내 용규, 둘째 복선, 맏이 복려, 셋째 복진

 Q.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한국의 식생활은 세계 어디다 내놓아도 자랑할만 합니다. 우리의 음식은 발효식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릇 마다 뚜껑이 있습니다. 한국의 음식물에는 특별히 정제된 비타민을 먹지 않아도 될 영양가가 고르게 들어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식문화 속엔 범절(凡節)에 차서(次序)를 두어 현명하게 섭취 해 왔습니다. 이같은 우리의 뿌리깊은 높은 수준의 식문화가 서양의 성의없는 즉석식품인 인스턴트에 밀려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식문화를 지켜나가기 위해 모두가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황혜성여사는 이조궁정요리 통고를 비롯해서 한국요리백과사전과 조선왕조 궁중음식 등 30여권의 저서를 펴냈다. 국민훈장 목련장(86년)과 문화훈장 보관장(90년)을 수상했다.

* 대담 : 李光榮 한국일보 부국장/과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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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식품자원부 전통한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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