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라상에 차려진 전골상
전골은 일반적으로 끓여 가며 먹을 수 있는 국물 요리를 폭넓게 일컫는 말로 쓰이지만, 원래는 고기, 생션, 채소 등의 재료를 각각 합에 담아 상 위에 준비해 두고, 화로 위에 테가 달린 둥그런 모양의 틀을 올려놓고 직접 끓이면서 먹는 것을 의미한다.
<대장금>에서는 중종(中宗 1488~1544)이 수라상을 받는 장면이 여리 차례 나오는데, 그때마다 곁에서 기미상궁과 생각시들이 시중을 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20세기 초까지 궁에서 일했던 싱궁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현된 것이다.
증언에 따르면, 수라를 들때 임금은 수라상궁 두 명과 생각시 한 명의 시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중 한 명은 기미상궁(氣味尙宮)이라 하는데 보통 나이 많은 노상궁이었다.
본래 기미상궁은 음식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것이 주된 임무였으나 실제는 임금의 식성을 잘 알아서 편하게 드시도록 이야기도 나누고, 드실 음식을 권하는 일을 했다. 또 한명의 수라상궁은 멀리 있는 음식 시중을 들고 모자라는 음식을 다시 가져오는 일을 했다고 한다.
생각시는 전골 끓이는 일올 전담했는데, 화로에 놓인 전골틀에 미리 준비한 재료들을 얹어 알맞게 익었을때 빈 그릇에 담아 올린다. 이때 수저는 국물을 넉넉히 뜰 수 있는 굽이 깊은 숟가락과 상아 젓가락을 사용했다고 진해 진다.
♣ 전골의 유래
흔히 전골과 찌개를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데 약간 다르다. 찌개는 음식의 재료와 양념을 한꺼번에 넣고 끓여 내는 것이고, 전골은 그때 그때 재료콜 넣어 익혀 가며 조리하는 것이다. 전골의 기원에 대해서는 예로 부터 다양한 설이 존재했다.
장지연(1864~1921)의 『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1909)에는 “전골은 그 기원을 잘 모르기는 하나 상고 시대에 진중 군사들은 머리에 쓰는 전립을 철로 만들어 썼는데 진중에서는 기구도 변변치 못하였던 까닭에 자기들이 썼던 철관을 벗어 고기와 생선들을 끊여 먹을 때 무엇이든지 넣어 끓여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여염집에서도 냄비를 전립 모양으로 만들어 고기와 채소 등 여러가지를 넣어 끓여 먹는 것올 전골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유동인의『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토정 이시함 선생이 항상 철관올 쓰고 다니다가 고기나 생선을 얻을때 머리에 썼던 철관을 벗어 끓여 먹었다 하여 선생의 별호를 철관자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를 전골의 기원에 관한 신빙성 있는 기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골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18.19세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18세기 말 유득공(1749~1807)의『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냄비 이름에 전립투라는 것이 있다. 벙거지 모양에서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 가운데 움폭하게 들어간 부분에 채소를 넣어서 데치고 그 가장자리의 편편한 곳에 고기를 굽는다. 술안주나 반찬에 모두 좋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19세기 서유구(1764~1845)의 『옹희잡지(饔𩟄雜志)』에도 “적육기(炙肉器, 고기 굽는 그릇)에 전립을 거꾸로 눕힌 것과 같은 모양올 한 것이 있다. 도라지, 무, 미나리, 파 등을 잘게 썰어 이것을 장수(醬水)가 들어있는 복판 음폭 들어간 곳에 담근다. 숯불 위에 을려놓고 철을 뜨겁게 달군다. 고기를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유장(油醬)에 적신 다음 젓가락을 사용하여 사면에 지져 굽는다. 한 그릇으로 서너 명이 먹는다.”라고 쓰여 있다.
전철이라는 단어는 궁중에서 전골 냄비를 가리킬 때 쓰던 말이다. 고종 6년(1868) 무진『진찬의궤(進饌儀軌)』에는 ‘진어전철안’이라 하여 전골상이 나온다. 이는 전철을 사용한 즉석음식을 궁중의 연회에 사용하였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