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농사를 위한 수단이자, 재산의 상징 중 하나였던 한우는 현대사회에서 우수한 음식이자 문화의 상징으로 빛나고 있다. 반만 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우리 곁을 지켜 온 한우가 들려주는 그 유구한 역사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 신성한 의식 속에 빛나다
한국의 소 사육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인 <후한서-동이전>을 살펴보면 이미 부여, 고구려, 예, 한 등지에서 모두 소를 사육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기원 전후 시기에 한민족 생활영역 전역에 걸쳐 소를 기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한우는 주로 의례에 제물로서 사용되거나, 짐을 싣고 사람을 태우는 데에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 일꾼으로 거듭난 소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우경(牛耕)’은 520년 신라 지증왕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 가평 이고리에서 보습틀이 나왔고, 서산 명지리 호 토광묘에서도 4세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보습이 발견된 것이 그 증거이다. 이 밖에 황우, 흑우, 백우 등 다양한 소가 우리와 함께 터전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 멀티플레이어로 활약
한우를 먹기 시작한 것은 소가 수렵과 목축의 대상물이 된 이후일 것이다. 식용 전통이 오래되면서 고유의 요리 종류도 개발되었는데, 중국에도 잘 알려진 ‘맥적’은 부여, 고구려 계통에서 개발된 것으로 먹기 전에 양념해서 구워먹는 불고기와 유사한 요리이다.
한편, 소의 부산물로 약재를 만들어 활용한 재미있는 기록도 전해진다. 고려시대 사서기록을 보면 소의 담낭 속에 생긴 응결물인 우황을 해열, 해독, 진정, 진통, 강심제로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멀티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한우는 노비, 말과 더불어 귀중한 재화로서 취급되기도 했다. 고구려에서는 소와 말을 죽인 자를 노비로 삼았으며, 고려시대에도 남의 말이나 소를 훔칠 경우엔 엄격한 법이 적용됐다.
♣ ‘한우’의 등장
농민의 입장에서 소는 농사를 짓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으며, 다행히도 한국의 풍토는 소의 번식에 적당했다.
조선왕조 500년에 걸친 우역과 전란 속에서 소의 손실이 불가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한우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우는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품으로 육성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 먹는 소로 이용되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등 지배층이 쇠고기 생산량의 대부분을 소비했기 때문에 고기의 육질을 개선하고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의 개발을 위해 노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홍석모(1781~1850)의 <동방세시기>를 보면 ‘요사이 한양 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훨훨 피워놓고 번철을 올려 놓은 다음 쇠고기를 기름, 간장, 계란, 파, 마늘, 고춧가루에 조리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다. 이것을 난로회라고 한다’라고 묘사된 부분이 있어, 그 옛날 고기 요리에 대한 우리 민족의 뜨거운 관심을 엿볼 수 있다.
♣ 친숙한 우리의 동반자 ‘한우’
이 밖에 소는 속담, 설화 속에 개, 호랑이와 더불어 자주 등장하며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설화 속에는 의리, 우직함, 희생과 헌신 등의 상징으로 자주 묘사되고 있다.
특히 꿈 풀이에서도 한우를 길한 동물로 묘사하곤 하는데, 황소는 길몽이고 검은 소, 점박이, 잡색의 소가 꿈에 나타나면 불길한 징조라고 한다. 이처럼 한우는 우리 곁에 듬직한 동반자로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자료 제공 : 전국한우협회,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