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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3. 빼놓을 수 없는 보조 음식, 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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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공터에서 가꾼 채소

채소는 오래전부터 필수 식품이었을 뿐 아니라 흉년에는 구황 식품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예로부터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집 근처에 공터가 있으면 채소밭으로 만들었으며, 곡물을 심고 남은 땅이나 논둑, 밭둑에도 채소를 심었다.

고려 시대 채소 재배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이규보가 텃밭에서 가꾼 오이, 가지, 무, 파, 아욱, 박 등 여섯 가지 채소를 읊은 한시「가포육영(家圃六詠)」이 있다. 다음은 그 중에서 무를 노래한 부분이다.

담근 장아찌는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김치 겨울 내내 반찬되네

뿌리는 땅속에서 자꾸만 커가니

서리 맞은 무 칼로 베어 먹으니 배같이 달구나16)

이 시는 강화도에 도읍이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도시의 관리들이 집 주변의 텃밭에서 채소를 심어서 먹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이규보는 채소 씨앗을 보내 준 이수(李需)에게 보낸 시를 남기고 있어 흥미 롭다.

이규보는 그 시에서 “채마밭에 뿌릴 씨 군후(君侯)께 얻었으니, 많은 종류 얻게 되어 나의 뜻과 정히 맞네. 파밭에 대공 솟기 애타게 기다리고, 오이 넝쿨도 시렁에 곧 뻗으리……”라고 읊었는데, 여기서 채소 씨앗이 좋은 선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당시 관료들은 씨앗을 주고받으면서 집 주변의 공터에 채소를 심었던 듯하다. 이런 현상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여서 공터만 있으면 채소밭을 만드는 것이 상례였다.

1411년(태종 11) 6월에는 서울 도성이 좁으니 도성 내에는 채소밭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지만 도성 내의 채소밭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종 때에는 궁궐 내에 있는 15곳의 채소밭이 문제가 되었지만 결국 묵인되었다.

또 1420년(세종 2) 5월에는 전구서(典廏署)안의 양을 키우는 마당이 채소밭으로 둔갑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고, 1511년(중종 6) 7월 대사성 유숭조는 성균관 안에 채소밭을 일구었다가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세종 때 지방관이었던 안직숭은 백성의 집을 헐고 채소밭을 일구기도 하였으며, 인조 때 이경릉은 뇌물로 채소밭을 받고 관직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조선 시대 한양의 도심 가운데 빈터가 생기면 곧 채소를 심었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한편 관청에도 채소밭이 딸려 있었는데, 그 중 사포서(司圃署), 침장고(沈藏庫)의 채소밭에서는 대개 왕실과 제사에 소용되는 채소를 생산하였다.

또 서울의 사부 학당(四部學堂)에도 채소밭이 내려졌으며, 훈련원이나 성균관에도 채소밭이 있었는데, 이 곳의 채소는 학생과 군인들의 먹을 거리로 충당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경우에 따라 관청에서 개인 땅을 점탈하여 채소밭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만 큼 당시 생활에서 채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도 채소 재배와 보관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였다.

흉년에 대비하여 무를 심을 것을 권장하거나 서리가 내리기 전에 채소를 거두어 겨울에 대비하라는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고, 선조 때에는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에게 채소 씨앗을 구입하여 오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당시 채소밭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채소를 가꾸었을까?

고려 시대의 채소밭은 이곡(李穀, 1298∼1351)이 쓴 「소포기(小圃記)」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이곡은 개경 복전방의 빌린 집 공터에 작은 채소 밭을 가꾸었는데, 그 밭은 길이가 2장 반이고 너비는 길이의 3분의 1쯤 되었다고 한다.

그 밭의 크기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대체로 길이 7.5미터, 폭 2.5 미터 정도가 되는데, 이곡은 거기에 8, 9개의 밭두둑을 만들어 채소 몇 가지를 심었다고 한다. 채소밭의 형태는 이후에도 비슷하였다.

조선 후기 농서 『산림경제』 치포(治圃)에 소개된 채소 휴종법(畦種法)에 의하면 『한정 록』에서는 채소밭 두둑의 크기를 길이는 한 길 정도, 너비는 석 자 정도, 『거가필용(居家必用)』에서는 길이 두 걸음 너비 한 걸음 정도로 한다고 하였으니, 그 모습은 요즘 도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말 농장의 조그만 밭 정도가 아니었을까?

「소포기」에 의하면 채소를 심은 첫해에는 아침마다 캐어 먹고, 남는 것은 이웃에도 나누어 주었는데, 이듬해는 가뭄과 장마로 수확이 반밖에 안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가뭄과 늦은 비가 더 심하여 수확이 더 줄었다고 한다.

이렇듯 당시 도시에 살던 관리들이 집의 공터에 채소를 가꾸고 이웃과 나누어 먹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 집 땅이 나쁠 경우 채소 재배를 위해서 비옥한 땅을 새로 마련하기도 있었다.

이규보가 이수에게 보낸 시 말미에 붙은 주석에 의하면 이규보는 자기 집 땅이 척박해서 새로 비옥한 땅을 얻어서 채소를 심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겨울에도 땅속에 움집을 짓고 채소를 재배한 사례가 있어 흥미롭다.

연산군은 장원서(掌苑署)와 사포서에 명하여 겨울에 흙집을 짓고 채소를 기르게 하였으며, 광해군 때 이충 역시 한겨울에 움집 속에서 채소를 재배하여 왕에게 바친 일이 있다. 이때부터 계절을 뛰어 넘는 채소의 시설 재배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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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한식진흥원 •전북음식플라자 •우석대학교 식품영영학 윤계순 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백두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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