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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3. 식료찬요(食療纂要)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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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식료찬요의 소개

♣ 식료찬요 저자 전순의(全循義)

전순의의 생몰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세종, 문종, 세조 3대에 걸쳐 활동한 전순의는 판서급에 까지 오른 어의로『醫方類聚』편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전순의가 처음 나오는 공식문서는 세종 22년 6월21일의 『朝鮮王朝實錄』으로 ‘임금께서 금성대군의 병이 나은 것을 기뻐하여 시병한 환관 최습에게 말 한필과 밭 5결을 하사하시고, (중략) 양홍수 · 전인귀 · 전순의 · 김지에게 각각 옷 한 벌을 하사하셨다.’이다.

이후 전순의는 세조 즉위년에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자헌대부 동지중추원사등을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관직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전순의는 당대 최고 수준의 명의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문종의 승하로 이어진 의료과오의 책임 때문에 중죄를 추궁당하기도 하였다.

전순의는 장기간에 걸친 어의생활과 자신이 참여했던 『醫方類聚』편찬사업 등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저술인 『食療纂要』와 『山家要錄』를 남기게 되는데, 궁중에 소장되어온 의서와 『醫方類聚』의 식치 부분을 상당부분 참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전순의는 침구치료에 관한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세종 29년(1447) 김의손과 같이 편찬한 『鍼灸擇日編集』이다. 최근 북한에서 발견되었다고 알려진 『鍼灸擇日編集』은 중국에서는 여러 차례 출간되었지만, 우리나라에는 남아있는 판본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료찬요 원본
<식료찬요 원본>

♣ 식료찬요의 소개

전순의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음식치료법으로 간편한 처방을 모아 45문을 만들어 바치자, 세조께서 직접 식료찬요라 이름을 내리시고 전순의에게 서문을 쓰라고 명하신 것으로 세조 4년(1460) 11월에 완성된 책이다. 식료찬요(食療纂要)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김휴(金烋, 1597~1638)의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을 통해서 이러한 책이 있었다고만 알수 있었다. 여기에서 식료찬요(食療纂要)의 서문을 인용하면서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식료찬요(食療纂要)의 서문과 단 2곳에서 표현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식료찬요(食療纂要)서문에는 ‘각 문의 식품 이름아래에 혹 정음을 달아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사용할 때 분명하게 의심된 바가 없게 하도록 교시하였다.’라고 하였는데,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에서는 ‘각 문의 식품 이름아래에 혹 언문으로 해석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고 쉽게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정음과 언석의 표현차이는 있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서로 같은 내용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

둘째, 식료찬요(食療纂要)원문에는 ‘오채’로 나와 있으나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에는 ‘일엽’으로 나와 있다. 이는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의 오류로 보인다. 오채는 오곡, 오육, 오과와 같이 식품의 대명사격이고 콩잎 · 염교 · 부추 · 파 · 아욱 등 5가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승운은 자신의 논문에서 식료찬요(食療纂要)는 강원도 양양판본과 경상도 감사 손순효가 판각한 상주판본 2종이 있다고 하였다. 이중 상주판본에 대하여서는 성종 18년(1487) 4월 27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 보이는데, ‘우찬성 손순효가 식료찬요(食療纂要)를 임금께 올렸다.

이 책은 의원인 전순의가 편찬한 것으로 손순효가 일찍이 경상도 감사가 되었을 때 상주에서 간행하도록 한 것이다. 임금께서 전교하기를 이 책은 보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어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고 하시었다.’고 하였다. 농촌진흥청 관계자가 백방으로 상주판본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양양판본만 내 손에 오게 되어 판본 상호간의 비교검토를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게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양양판본의 서문에는 분명 ‘각 문의 식품 이름아래에 혹 정음을 달았다’고 하였지만, 양양판본에는 훈민정음으로 표현되거나 이두문자로 표현된 것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최세진(崔世珍, ?~1542)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식료찬요(食療纂要)를 인용하면서 음식이름을 설명하고 있어 주목된다.

예를 들면 식료찬요(食療纂要)제풍(諸風)문의 1-12조에 나오는 박탁을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식료찬요(食療纂要)에 근거하여 ‘나화(수제비)’라고 하였다.

즉 훈몽자회(訓蒙字會)를 편집하면서 식료찬요(食療纂要)의 물명에 쓰인 정음을 참고하였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아마 상주판본을 참고하였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그러면 왜 양양판본에는 정음을 달지 않았는데 양양판본의 서문에는 정음을 언급하였을까 의문이 된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할 수 있다.

첫째, 양양판본을 출간하면서 서문에는 언급하였지만 내용을 서술하면서 정음을 고의로 삭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왜 일부러 삭제하였을까 의문이 남는다.

둘째, 본문과 서문이 서로 다른 시기에 서술되었으나 나중에 간행하면서 2개를 합쳐서 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상주판본을 직접 보지 못한 역자의 입장에서는 그 차이점을 더 이상 발견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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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호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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