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수문사설(䛵聞事說)』의 지은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을 통하여 숙종 43년(1717) 당시 내국(內局)의 도제조 판부사를 지냈던 이상국(李相國)이라는 사람이 지은이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음이 밝혀졌다(相國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총칭이기도 하기때문에 추후 심도 깊은 연구가 요망됨).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지은이가 중인 계급의 중국어 통역관이었다고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서, 지은이는 숙종대에서부터 영조대에 걸쳐 왕을 측근에서 보필했던, 고위직의 자제임과 동시에 직위도 내국(내의원)에 소속된 의관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어쨌든 지은이는 손수 음식 만들기를 좋아했고, 궁중의 성상 및 숙수들과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며 숙종 41년(1715)에는 위장질환을 앓고 있으면서 숙종을 보필하였다. 또 경종께는 붕어죽·연근죽 등을 만들어 올려 잡숫도록 하였다. 특히 경종 원년 이었던 1720년에 붕어죽을 올렸다 하였다.
그런데 경종을 선왕(先王)이라고 한 점에서, 이 책이 쓰여진 시대는 영조대이다. 따라서 책의 집필 연대는 영조의 재위년인 1724년에서 1776년의 어느 시점이 될 것이다. 그가 위장질환을 앓고 있으면서 숙종을 보필했던 1715년을 빨라도 30세경으로 잡는다면 책을 집필한 나이를 65세 정도로 보고 대략 1750년 전후가 책의 발간 연도가 아닐까 한다.
일상생활에 여러가지 필요한 내용을 찾아 듣고 정리하였다는 뜻에서 책의제목도 『聞事說』이라 하였는데, 이상국(李相國)이 쓴 「온돌(溫突) 만들기」와 이시필(李時弼)이 찬(撰)하고 이상국이 명명한 「이기용편(利器用編)」에 지은이가 쓴, 음식으로서 치료하는 방문 즉 약선(藥膳)을 의미하는「식치방(食治方)」을 합하여 구성한 것이 『수문사설』이다.
지은이의 글이 아닌 「온돌만들기」와 「이기용편」을 지은이의 글보다 앞에 실은 것은 이상국과 이시필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 내고자 한 것이다.
본관이 경주(慶州)로 확실히 드러난 이시필의 예로 보건데, 또 이상국이 내국의 도제조판부사라는 사실, 이시필 또한 내의(內醫)였다는 점에서 본관이 경주이씨이면서 내의원의 의관인 지은이가 집안의 기록물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기록으로 남긴 것이『수문사설』이 아닐까 한다.
『수문사설』속에는 지은이가 음식을 만들어 직접 올리는 일이 등장하고 있고, 음식과 관련해서는 「食治方」이라고 쓰고 있다. 어쩌면 지은이 집안은 대대로 이어온 의사집안 일 수도 있다.
이상국이 「온돌만들기」를 쓴 것은, 민중들이 보다 따뜻한 곳에서 생활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기용편」역시 당시 연행사들이 연경의 풍물을 목격하고 그 풍물 중 민중들의 삶을 보다 편하게 할 수 있는 기용들을 선택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물고기를 보다 쉽게 잡는 기구, 메추라기 포획망, 음식을 쉽게 찔 수 있는 대로 만든 시루, 가래, 풀무, 쥐잡는 도구, 기름 짜는 기구, 줄 만드는 기구, 기름 항아리, 곡식 저장 용기, 체, 디딜방아, 작두, 심은 곡식의 씨앗을 다지는 기구, 곡식을 가루로 만드는 기구, 주조, 수레, 식도, 콩 삶는 쇠체, 쇠조리, 쇠로 만든 얼레미, 철등잔, 철등경, 옷을 희게 하는 돌가루, 씨를 없애는 기구, 쇠로 만든 조리기기, 벽돌로 만든 화덕대 등이 실려 있는 바, 이들은 후의 북학사조 유행과 연계되어 민중들에게 기여한 바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