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의 글인「식치방」은 음식문화사적인 면에서 볼 때 조선왕조에서 1795년에 간행한『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필두로 해서 1800년대에 나온 『진연의궤(進宴儀軌)』나 『진찬의궤(進饌儀軌)』에 수록된 궁중찬품과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음이 발견된다.
당시의 사회상이 청나라와는 연행사(燕行使)를 통하여 일본과는 통신사(通信使)를 통하여 빈번한 교류가 있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청나라음식과 일본음식이 소개되고 있다. 이들 외국음식들은 궁중숙수들이 배워가기도 하는데, 또 외국음식은 아닐지라도 지은이 자신이 전해들은 음식을 직접 만들어 왕에게 올려 낙점 받기도 하는 등 궁중음식에 영향을 미친 찬품들 다수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순창, 송도, 낙동, 강화에서 전해 듣거나, 향리 또는 환가 그리고 궁중의 숙수였던 박이돌, 사복거달 지얼남, 장악주부 민계수의 노비였던 차순, 사옹고의 성상 권탑석, 중국, 일본 등지로부터 전해온 찬품들의 재료와 만드는 방법을 적으면서, 동과증, 우병, 부어증은 낙점 받아 임금께 진상하기도 하고, 황자계혼돈은 궁중 숙수였던 사금과 돌이가 와서 배워가기도 하는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하면서 전해들은 당시의 음식문화 상황이『수문사설』속에는 전개되고 있다.
실제로 『수문사설』속에 등장하는 굴만두, 분탕, 청해, 부어증, 가마보곶, 모로계잡탕, 황자계혼돈, 열구자탕, 고초장등과 같은 찬품이 1795년에 나온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반영되거나 1800년대의 「조선왕조궁중연향식의궤」그리고 1901년과 1902년의 『진연의궤』속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수문사설』「식치방」의 조리문화사적 가치는 1750년을 전후 한 당시 상류계층들이 누렸던 식생활상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궁중음식문화의 형성배경 그리고 중국과 일본음식이 어떻게 궁중음식에 반영되었는가 등에 관한 구명(究明)에 고문헌이 가지는 유일함에 있을 것이다. 그만큼 『수문사설』은 음식문화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원전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고서로 「온돌만들기」,「이기용편」,「식치방」순으로 되어있으나, 지은이가 직접 쓴 「식치방」에 대한 현대적 해석에 보다 비중을 두어 「식치방」을 앞에 놓고 「이기용편」,「온돌만들기」순으로 배열하였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