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에 제주 흑우는 삼명일(임금의 생일, 정월초하루, 동지)과 중요한 제사에 빠지지 않던 진상품이며 친경(親耕)에도 이용
○ 조선에서 국왕이 해야 하는 일 중 가장 중요시 여기던 제사(祭祀)에 항상 빠지지 않던 제향용(祭享用) 제물(조선왕조실록)
- 중종 36년에 가뭄의 재해가 극심하여 흑우가 병에 전염되어 죽어 제사에 쓸 물건이 줄어들어 걱정이라는 기록이 존재
*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 도움을 준 것을 기리는 제사에 흑우를 이용하는 기록이 전함(숙종 30년, 영조 38년)
- 인조 5년 병자호란 당시 금(金)나라와의 화친을 위해 백마와 흑우를 잡아 신의를 표하면 어떠한가를 논의하는 장면이 등장
- 제주의 기근으로 백성을 위로하는 문서에서 다른 공물의 진상은 연기하나 흑우, 감귤, 말은 예외로 한다는 내용이 존재(정조 8년)
* “흑우와 감귤은 더없이 중요한 제사에 바치는 물건이고, 또 공마(貢馬)는 군정(軍政)에 속한 것이니 만큼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고 언급
○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것으로 모범을 보이는 친경(親耕)에도 흑우가 이용되었던 것으로 기록(조선왕조실록)
- 영조 43년에 친경의 참석자들(왕세손, 종실, 대신 등)이 밭갈이를 몇 번 할 것인가와 이용하는 소를 흑우로 정하는 장면이 있음
탐라의 나라굿(國祭), 입춘굿에도 등장하는 흑우?!
▷ 고대 제주도에서는 입춘(立春)에 탐라의 왕이 제사장이 되어 나라굿을 치루면서 백성들 앞에서 밭을 가는 전통이 존재
- 조선시대에 와서는 향리(鄕吏)의 우두머리가 왕을 대신하여 나무소(木牛)를 끌면서 농사를 짓는 행사를 하고 풍년을 비는 거리굿으로 변모했다고 함
- 1924년 일제하, 제주도청의 ‘미개의 보고 제주도’에 의하면 “매년 입춘일 목사청에 모여 동리마다 흑우(黑牛) 한 마리를 바쳐 목사와 도민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함과 동시에 농작물의 풍요를 산신과 해신에게 빈다”는 내용이 전함
□ 조선시대에는 흑우를 키우는 국영목장을 따로 운영할 만큼 공우(貢牛)에 힘을 기울였으며, 점차 이로 인한 수탈도 증가
○ 국영목장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해발 200에서 600고지 사이에 ‘잣성’을 쌓아 10개소를 설치하고 기지화
* 잣성은 조선 초기부터 한라산에 설치된 국영목장의 상하좌우 경계에 쌓은 돌담을 가리키며 목축과 관련해 제주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유산
○ 바쳐지던 흑우의 마릿수도 인조까지는 15마리였으나 효종이후 영조까지 20, 정조 때에는 40, 헌종에 와서는 42마리로 증가
*중앙 상납액이 증가하게 되고 그에 대한 부담은 제주민에 큰 부담으로 작용
조선시대, ‘제주흑우’는 ‘영국인’에게도 시달렸다?!
▷ 넓은 초지를 이용하여 국가 제사용 흑우를 키우던 가파도에 19세기에 영국 군함이 출몰하여 제주흑우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
- 가파도(加派島, 제주 모슬포항에서 마라도 가기 전에 있는 섬)에는 1750년(영조 26년)부터 임금에게 바칠 흑우 50두를 방목하여 기르기 시작
- 이후 1840년(헌종 6년) 가파도에 영국군함이 상륙해 대포로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흑우를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하여 당시 현감과 목사(지금의 도지사)가 파직됨
* 참고문헌: 제주의 마을, 대정읍 영락리 마을약사
□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식량자원으로서 흑우를 포함한 한우가 수탈
○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에서 부족한 식량을 얻기 위해서 미곡증산정책과 식육자원으로서의 한우의 이용을 동시에 추진
- 생축(生畜)의 반출뿐만 아니라 한우의 개량과 증식, 한우육의 안정적인 일본 공급을 위한 체계적인 수탈 정책을 시행
조선시대의 흑우, 일본의 화우가 되다?!
▷ 일본 화우 개량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전래한 한우와 일본 종을 뿌리로 하며, 1900년대부터 외국종과의 교잡으로 본격화
- 일본이 자랑하는 ‘고지현(高知縣)의 갈색 털의 화우’,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미시마소’, ‘타지마소’ 역시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전래(’09, PD저널)
- 특히 미시마소의 경우, 생김새나 성질이 제주흑우와 매우 흡사한 것이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