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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2. 제주의 보물, 가축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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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조선시대의 제주마

□ 조선은 대명외교(對明外交)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으며, 공출 되는 횟수가 많아져 마리수와 말의 질이 쇠락하는 결과를 양산

○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명나라에 보내는 공출로 극심하게 개체 수가 줄어 임진왜란 때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사태까지 야기

- 세종 3년 명의 사신을 마중 가는 신하에게 당부하는 말을 통해, 명의 제주마에 대한 공출 압력이 극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음

- 선조 29년 임진왜란 당시 전쟁에 나갈 우수한 말이 없어 왜군에 대응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기도 하였음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함께 했던 제주마?!

▷ 조선 태조 이성계의 8마리 말들 중 정치적으로 가장 큰 의미를 두는 말의 이름은 응상백(凝霜白)이며 제주산

- 성삼문은 그를 칭송하며 “응상백이여! 참으로만 칭할 것이 아니라 크고 강하고 또 슬기롭네. 압록강물 넘실넘실 기슭은 천 척인데 흰 깃은 반짝 붉은 활과 함께 빛이 나네…”라는 명문을 남김

응상백(凝霜白)
<응상백(凝霜白)>

○ 임진왜란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군사용 말이 여전히 부족하고 병자호란에는 청이 요구한 말을 댈 수 없었을 지경

- 인조 5년 병자호란이 있기 9년 전, 청에서 화친을 위해 제주마 2백 필을 요구하나 이를 마련할 길이 없어 방도를 논의

□ 조정에서 사용할 말이 부족했던 데에는 대명 공출에 의한 외부적 요인도 있었으나 관리의 부패 등 내부적 요인도 한 몫(‘07, 제주대)

○ 공마의 수송은 봄부터 여름에 걸쳐 주로 이루어지는데 태종 18년 당시 바다를 건너는데 만도 양곡 1천석의 비용이 소요

○ 수령이나 상인들이 무분별하게 양마를 골라 제주도 밖으로 나갔으므로 우량한 종마(種馬)가 절종의 위기에 놓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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