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
▸ 나그네가 머물 수 있도록 술과 밥을 파는 건축물
주사(酒肆)·주가(酒家)·주포(酒舖)라고도 불렸으며,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술집과 식당과 여관을 겸한 영업집이라고 할 수 있다. 주막은 시골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도회지에도 많이 있어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생겼을 정도이다. 대체로 주막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으로는 장터, 큰 고개 밑의 길목, 나루터, 광산촌 등이었다.
조선시대에 주막이 많기로 유명했던 곳으로는 서울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중간인 소사·오류동에 많았는데, 서울에서 출발하면 점심 때쯤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문경새재에 주막촌을 이루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나라에서 운영하던 조령원(鳥嶺院)·동화원(桐華院)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천안 삼거리는 능수버들의 전설과 함께 주막이 번성했던 곳이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길목인 섬진강 나루터의 화개(花開), 한지와 죽산물·곡산물의 집산지인 전주 등이 주막이 많았던 곳으로 꼽힐 수 있다. 주막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정확한 고증은 할 수 없다.
기록상으로 주막의 효시는 신라시대 경주에 있던 천관(天官)의 술집으로 볼 수 있다. 김유신(金庾信)이 젊었을 때 천관이 술 파는 집에 다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1097년(숙종 2)에 주막이 등장했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큰 경우 방이 수십 개에다 창고와 마구간이 있어 행상인들의 물건을 맡아 주기도 하고, 마구간에서는 마소나 당나귀 등 짐승을 관리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골의 작은 주막은 방 몇 개에 술청이 있는 정도이며, 거리의 간이주막은 허술한 지붕에 가리개로 사방을 막아 놓고 낮 동안에만 장사를 했던 곳도 있었다.
주막의 표시로 문짝에다 ‘주(酒)’ 자를 써붙이거나 창호지를 바른 등을 달기도 하였다. 또, 장대에 용수를 달아 지붕 위로 높이 올리거나, 소머리나 돼지머리 삶은 것을 좌판에 늘어 놓아 주막임을 알리기도 하였다. 주막에는 요즘처럼 간판은 없었으나 이름은 있었다.
이 이름은 주막집 쪽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손님들이 지은 것으로, 오동나무가 있는 집이면 오동나무집이요, 우물이 있는 집이면 우물집, 주인의 뒷덜미에 혹이 있으면 혹부리집 등으로 불렸다.
주막의 구조 중에 특수한 것은, 부엌이 주모가 앉아 있는 방이나 마루에 붙어 있어서 방이나 마루에 앉아서도 바로 술이나 국을 뜰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주막에서 일하는 사람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다. 즉, 주모 혹은 주파가 앉아 주막의 모든 일을 꾸려 나갔다.
주막에서 시중드는 남자아이를 ‘중노미’라고 했는데 이는 주로 안주를 굽거나 공짜 안주를 먹는 사람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밖에 허드렛일을 하는 여인들도 있었다. 주막이 주막의 구실을 다하면서 길손의 향수를 달래 준 것은 아무래도 촌마을의 외딴 주막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러한 주막은 대부분이 서민들이 이용하는 곳인데, 길가는 나그네는 물론이고 장을 따라다니는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주막의 기능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첫째는 손님에게 술을 파는 것이요, 둘째는 요기를 할 수 있게 밥을 제공하는 것이며, 셋째는 숙박처를 제공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어서 정보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고, 문화의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어서 문화의 전달처 구실을 하였으며, 피곤한 나그네에게는 휴식처가 되었고, 여가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유흥을 즐기는 오락장 구실도 하였다.
옛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사먹으면 대체로 잠은 공짜로 재워 주었다. 잠을 자는 길손들은 대개 도착순으로 먼저 온 사람이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게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주막에서 팔았던 술은 탁주가 주종이었고 소주도 팔았으며, 양반 손님을 위해 맛과 향기를 넣어 만든 방문주(方文酒)를 팔기도 하였다.
옛 주막에서는 술을 한 잔·두 잔씩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는 무료 안주가 한 점씩 붙어다녔다. 주막의 목판에는 안주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마른안주로는 육포·어포 등이 있었고, 진안주로는 쇠고기·돼지고기 삶은 수육과 너비아니·빈대떡·떡산적·생선구이·술국 등이 있었다.
주막에서 파는 술국을 해장국(원래는 解酲 또는 양골국)이라 하였다. 살코기를 발라낸 뼈다귀를 도끼로 토막 쳐서 흐무러지게 끓이면 허연 국물이 된장맛과 어울려서 구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허기를 메워 주는 식사류는 장국밥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이는 순전히 양지머리로만 국물을 뽑기 때문에 국물이 순하다.
간을 맞추기 위해 간장을 타면 연한 국물빛이 장국을 더욱 맛있게 하였다. 서울에서 과거라도 있으면 주막은 과거 보러 가는 손님들로 만원이 된다. 주막에 들어 돈만 낸다고 해서 특실에 들거나 상석에 앉지는 못하였다. 지위나 권세가 낮으면 천금을 낸다 해도 구석방이나 마루방으로 밀려나게 마련이었다.
양반이 판을 치고 양반 중에서도 권세 있는 자가 특실에 들어 거드름을 피웠던 것이다. 어쩌다 손님끼리 시비가 붙으면 따라온 하인들끼리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 주인은 돈도 못 받고 그들의 뒤치다꺼리에 골탕만 먹게 된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는 주막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승 맹사성(孟思誠)이 고향 온양에서 상경하다가 용인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주막에 먼저 들었던 시골 양반이 허술한 맹사성을 깔보고 수작을 걸어 왔다.
그는 ‘공’ 자와 ‘당’ 자를 말 끝에 붙여 문답을 해서 막히는 쪽에서 술을 한턱내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맹사성이 먼저 “무슨 일로 서울 가는공?” 하니, 그 양반이 “과거 보러 가는당.” 하였다. “그럼 내가 주선해 줄공?” 하니, “실없는 소리 말란당.” 하였다.
며칠 뒤 서울의 과거장에서 맹사성이 그 시골 양반을 보고 “어떤공?” 하였더니, 그는 얼굴빛이 창백해지면서 “죽어지이당.” 하였다. 맹사성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주막은 기방이나 색주가·객주집·여각(旅閣)과는 달랐다.
기방은 기녀가 주로 돈 많은 양반들에게 기악(妓樂)과 함께 술을 팔았던 곳이고, 색주가는 접대부들이 술과 색을 팔던 곳이다. 상품판매와 관련해서 번성했던 것 가운데 객주집은 행상인의 숙식과 상품의 중개나 위탁판매를 했던 곳이고, 여각은 행상인들을 위한 숙박업을 주로 하던 곳이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막도 변하여 조선 후기에 와서는 내외주점, 거리의 주막, 색주가, 선술집 등이 생겨났다. 내외주점은 여염집 아낙네가 살 길이 막연하여 차린 술집으로, 문을 사이에 두고 술꾼과 거래를 하던 주점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남녀 사이의 내외가 엄격하던 실정이라 마주 대하지 못하고 문 사이로 팔뚝만 내밀어 술상을 건네주었다고 팔뚝집 혹은 내외주점이라 하였다. 거리의 주막은 막벌이 노동자를 위해 새벽녘에 거리에서 주모가 모주를 팔았다.
모주란 술을 걸러 낸 찌꺼기에 다시 물을 붓고 우려 낸 술이므로 주도도 낮았고 맛이 없었다. 모주의 안주로는 비지찌개를 끓여 팔았다. 색주가란 조선 세종 때 생긴 것으로 그때는 주로 명나라에 사신 가는 이들을 위하여 주색을 베풀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는 값이 비싼 기생집에 가지 못하는 부류들이 주로 색주가를 이용하였다. 선술집은 목로(木櫨)라는 나무탁자를 두고 서서 간단히 마시는 술집이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선술집이 매우 번창했는데 일본 사람들도 ‘다치노미’라 부르며 애용하였다.
서울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오늘날에도 술과 해장국을 파는 곳이 더러 보이는데, 이것이 모두 옛 주막의 후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술집인 맥주홀·스탠드바·카페·룸살롱 등은 주막과 거리가 먼 것들이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