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술의 기원
술의 古字는 유(酉: 닭, 서쪽, 익을)자이다. 유(酉)자는 밑이 뾰죽한 항아리(술의 침전물을 모으기 편리하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반면 ‘술’의 고유한 우리말은 ‘수블/수불’이었다. 수블<수울<수을<술로 변천하였을 것이다.
옛 사람에게는 물이 난데없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신기하여 물에 불이 붙는다는 뜻으로 옛사람에게는 ‘수불’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옛날에 물은 神이, 술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술의 기원은 신화로만 전해진다.
서양의 경우, 이집트에서는 천지의 神이시스의 남편인 오시리스가 곡물신에게 맥주 만드는 것을 가르쳤다고 하고, 그리스 신화는 디오니소스, 로마는 바커스를 술의 시조로 말하고 있으며 구약성서에서는 노아가 최초로 술을 만든 사람이라고 한다.
반면, 동양의 경우, 중국에서는 황제의 딸 의적이 처음으로 빚었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술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우리 문헌에 나타나는 술이야기는 제왕운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하백의 딸 유화가 해모수의 꾀에 속아 술에 만취된 후 해모수의 아이를 잉태하였는데 그가 주몽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 문헌에 술에 관한 기록이 드물지라도 술이 단순히 중국에서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미 고조선시기 이전부터 동아시아 대륙에 번성했던 우리 민족은 발효 문화를 장기로 하였으므로 술의 역사도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술의 기원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이라기보다 화북과 산동 지역의 동이족 술 문화가 중국과 한반도에 동시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2. 고구려의 제민요술
부여, 진한, 마한, 고구려의 무천, 영고, 동맹 등 제천행사에서 ‘주야음주가무’하였다는 삼국지 위지 등 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실로 발효의 나라라 할 만큼 훌륭한 술과 앞선 장담그기 기술이 발달했다.
이때에 이미 술누룩 주국(酒鞫)과 穀芽(곡아)로 술을 빚는 방법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AD 430년경 북위의 산동태수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이라는 책은 고구려의 주조 기술을 규명하는데 실로 중요한 자료이다.
산동반도가 역사이래 우리 민족의 직․간접적인 영향하에 있었던 문화지역인데다 북위와 고구려의 민족적․지리적․정치적 인접성으로 고구려의 술빚기가 거의 제민요술에 고스란히 살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주조기술은 중국으로 건너가 곡이주라는 명주를 잉태하고 고구려의 양조기술을 이어받은 낙랑주법이 신라사회에 뿌리를 내려 신라주가 당대의 운수들에게 애용되었다.
3. 백제의 술
지금도 일본에서는 주신으로 모시는 백제사람 수수보리가 일본에 누룩과 술을 빚는 법을 전함으로써 비로소 일본에 술다운 술이 생겼다고 한다.
일본고사기의 중권(응심천황조)을 살펴보면 베 짜는 기술자인 궁월군의 증손인 수수보리가 일본에 가서 응신천황에게 술을 빚어 바쳤더니 왕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수수보리가 빚은 술에/ 나도 취했네
/태평술 즐거운 술/ 나도야 취했네”
양조기술자인 수수보리는 이름의 뜻이 ‘술거르는 이’로 이때에 이미 백제에서는 발전된 양조법으로 술이 빚어진 것이다. 백제의 술은 자세한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없어 말하기 어려우나 일본에 남아있는 기록과 술빚기 기술로 보아 고구려의 술빚기에 그리 못하지 않은 것이었을 것이다.
4. 신라와 통일신라의 술
당대의 신인들이 칭송하던 신라주의 명성은 아마도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듯하다. 삼국 중 비교적 늦은 시기에 국가의 체계를 형성한 신라는 술빚기에서도 처음에는 가장 낙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화와 함께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술빚기 기술은 국력과 함께 날로 발전하여 당대 시인 이상은의 時調“한잔 신라주의 기운이 새벽바람에 스러질까 두렵구나” 하는 정도로 성장하였고 해동역사에 나오는 고려주가 바로 신라주라 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태종 무열왕은 식량으로 하루에 쌀 3말, 꿩 10마리가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통일 신라시대에 이르면 양조곡주들이 다양하게 개발되고 상류사회에서는 청주류의 음용이 성행하게 되었다.
5. 고려시대
고려시대가 되면 전래의 곡주류 양조법은 이미 완성되어 고려전기 중에 청주류, 중양주류, 탁주류, 재주류, 감주류 등의 양조기술과 종류가 심화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송나라와 빈번한 교류가 있었고 사원에서는 여권업을 겸하여 술을 빚어 팔기도 하였다.
한편 궁중이 양온서(궁중에서 술을 빚던 관청, 후에 장예서, 사온서로 명칭이 바뀜)에서도 국가의 의식술을 빚었다.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 사람들은 술을 즐긴다. 그러나 섬니들은 양온서에서 빚는 그러한 좋은 술을 얻기가 어려워 맛이 박하고 빛깔이 짙은 것을 마신다.”고 고려의 술이 묘사되어 있다.
양온서에서 빚는 술은 법도대로 빚는다고 하여 법주라고 하였는데 요즘의 법주와는 전혀 다른 술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종묘제사에 관용으로 쓰는 주양주였을 것이다.
또 고려시대에 비로소 소주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동의보감과 본초강목에 의하면 소주는 원나라때 아라비아에서 원→만주→고려의 순으로 전해진 듯하다. 소주가 유입된 시기는 대체로 고려 충렬왕(1277년) 3년이며 소주 음용기원 시기는 충숙왕에서 충혜왕(1314~1345)사이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포도주 : 쌀로 빚은 술에 포도를 넣어 빚은 술
도소주 : 원단에 마시는 약술로써 백출, 대황, 질경 등 한약제를 넣어 빚은 청주류
유주 :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몽고술인 마유주를 고려에 전했다 함
감주 : 감향주와 향감주가 있다. 단양주이다.
이화주 : 특이하게 쌀누룩을 사용한 탁주의 일종.
이처럼 고려시대는 우리나라 술의 3대 분류인 탁주, 약주, 소주의 기본 형태가 완성된 시대이다.
6. 조선시대
조선시대 술빚기의 특징은 중앙주류가 발달하고 양조원료도 멥쌀 일색에서 참쌀이 점차 늘어난다는 점과 부본(腐本) 즉 술밑을 사용하여 효모를 증식시키는 기법이 발전하였다는 점 등이다.
조선시대에 유명했던 술은 무려 300여 가지에 이르나 그 중에서도 백하주, 삼해주, 이화주, 청감주, 부의주, 향온주와 약산춘, 호산춘, 노산춘 등의 춘주류들을 손꼽을 수 있다.
소주도 날로 소비가 늘어 다산 정약용이 전국의 소주고리를 거두어 들여 식량난을 예방하자고 상소하기도 할 정도였고 유명한 소주로 감홍로, 죽력고, 이강고 등이 있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합주류와 과하주류가 출현하여 탁주, 약주, 소주에 혼양주가 덧붙여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술
탁주
- 이화주 : 쌀누룩으로 빚은 진하고 주도가 높은 탁주
- 사절주 : 막누록으로 빚되 청주를 조금 얻고 탁주고 대부분 걸러 마시는 술로 맛이 이화주와 비슷함
- 혼돈주 : 연산군때 정희량이 빚었다고 하는 술로 사흘만에 걸러 마신다. 혹은 탁주에 소주를 타서 마시는 술이라는 설도 있다.
- 합 주 : 약주를 뜨지 않고 탁주로 걸러 마시는 순탁주
- 모 주 : 술지게미에 물을 타서 끓여 낸 것
홍주와 백주
- 천대홍주 : 홍국과 누룩 찹쌀로 빚은 술
- 백 주 : 탁주에 속함
감주
- 감 주 : 누룩으로 빚은 술의 일종으로 술과 식혜의 중간
- 청감주 : 물 대신 좋은 술로 빚어 감미를 더한 주도가 낮은 술
- 이양주, 청서주 : 여름철에 빚어 먹는 술로 큰 자배기에 찬물을 붓고 수시로 갈아주며, 술독을 그 속에 잠그어 저온 발효시킨다.
- 와송주 : 스스로 누운 생소나무의 둥치를 말구유 모양으로 파내고 그 속에 술을 빚어 넣어 진흙으로 봉하여 익힌 술
- 죽통주 : 생대나무의 절간을 뚫고 술을 빚어 넣어 익힌 술
- 가향주 : 도화주, 송화주, 송순주, 하엽청, 연엽향, 진달래술
- 과실주 : 포도주, 송자주
소주
- 공덕지소주 : 서울교외의 시골인 공덕리에 운집한 소주가에서 빚은 순곡 소주. 임진왜란 이후부터 시작됨
- 안동소주 : 안동지방에 널리 빚어진 순곡 증류주
- 찹쌀소주 : 찹쌀로 빚은 술밑을 고아낸 소주
- 삼해소주 : 삼해주의 술밑을 고아낸 소주
혼양주
- 과하주 : 여름을 넘기는 술. 약주에 소주를 섞어 주도를 높인 서울식 과하주와 달고 진하게 빚어 여름을 넘기는 김천식 과하주가 있다.
- 송순주 : 찹쌀밥, 송순으로 빚은 술밑에 삼해소주를 부어 서늘한 곳에서 삭힌 술
약용소주
- 관서 감홍로 : 소주를 고을 때 지초와 꿀로 바쳐 내린 소주
- 이강고 : 울금, 계피, 배, 생강, 물을 소주에 넣어 합한 소주
- 죽력고 : 청죽을 쪼개어 불에 구워 스며 나오는 진액인 죽력과 물을 소주에 넣고 중탕한 술
약용약주
- 자 주 : 좋은 청주에 약재를 넣고 중탕한 술
- 구기주 : 구지자즙과 누룩쌀로 약주를 빚어낸 술
- 오가피주, 도소주, 밀주, 송절주 등 다수
7. 일제하의 술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며 가장 먼저 행하였던 일이 토지 조사, 주류 조사였다. 식민지 수탈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7집에 한 집 꼴로 술을 빚어 마셨다고 하며 우리에게는 조선왕조의 금주정책으로 술에 대한 과세나 전매제도가 없었고 따라서 술의 공업적 양조보다는 집에서 가양주를 빚어 마시는 가양주 문화가 그 특징이었다.
그러나 1907년 일제에 의해 조선주세령이 발표되고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면허를 주어 주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찬란 했던 가양주 문화는 단절되고 친일적인 부유한 지주에게 부여된 양조면허를 받은 양조장에서 공업적인 술 빚기가 시작되었다.
이에 양조에 필수적인 누룩제조도 기업화되어 조선곡자조합이 생기게 되어 식민지 조선에서 손꼽히는 산업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은 다양한 주품들이 사라지고 왜식청주(정종), 맥주, 양주 등 외래주를 음용하고 우리 전통술은 일반서민들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8. 해방 후의 술
해방의 감격에도 불구하고 오랜 수탈에 이어진 6․25전란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과 해방 후 청산되지 못한 일본식 제도의 잔재에 의해 우리 전통술은 오히려 일제 하보다도 더욱 더 피폐해졌다.
탁주가 75년을 정점으로 한때 양적 팽창을 보았고, 희석식 소주가 아직 큰 시장을 유지하고 있는 등 외형적인 모습은 왜곡된 채로나마 발전하였다 하더라도 일제하와 해방 후 현재까지 계속된 정부의 보이지 않은 소외 정책으로 우리의 진정한 전통술은 거의 명맥이 끊어져 버렸다.
다행히 1980년대 이후부터 불합리한 규제와 제약이 조금씩 해소되어 잊혀진 전통술 50여종이 재현되었으나 대부분 영세하고 전문 양조기술의 부재와 영업력 부재로 우리의 찬란했던 전통 가양주 문화가 복원되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실정이다.
뒤늦게 1995년부터 술을 개인이 빚어 마시는 것이 허용되어 90년간 가양주 문화 단절을 극복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