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평야와 바다를 접한 전라남도는 맛 고장으로 유명하다. 나주 역시 예로부터 진수성찬이 차려지던 고장으로, 남도에서 멋하면 전주요, 맛하면 나주라 할 만큼 식문화가 발달했다.
기름진 나주평야에서 맛 좋은 나주쌀이 재배되고 있거니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에 자리 잡았으니 해산물이 풍부하고 해풍을 맞고 자라는 채소류도 맛이 빼어나다. 종손 박경중 씨는 나주의 팔진미로 꼽히는 어팔진미, 소팔진미를 신명나게 소개한다.
어팔진미(魚八珍味)란 조금물 또랑참게, 몽탄강 숭어, 영산강 뱅어, 구진포 웅어, 황룡강 잉어, 황룡강 자라, 수문리 장어, 복바위 복어를 일컫는다. 소팔진미(蔬八珍味)는 동문안 미나리, 신원 마늘, 흥룡동 두부, 사매기 녹두묵, 전왕면 생강, 솔개 참기름, 보광골 열무, 보리마당 겨우살이이다.
♣ 손님 발길 이어지는 댁의 손님상
1년 내내 이어지는 제사에 밀양 박씨 나주 종가는 예로부터 손님이 많았다. 대대로 부농이라 이 댁의 일을 해주면 배불리 먹는다 하여 몰려들곤 하던 이웃도 그러하거니와 사학자 함석헌 선생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발길이 이 어졌다.
나주문화원장과 도의원을 지낸 종손의 너른 인품에 이 댁의 정성 어린 손맛이 담긴 손님상이 더해지니 손님의 발길은 오늘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밀양 박씨 나주 종가의 간장은 깊고 깔끔한 맛으로 유명한데, 대대로 이어져온 씨간장을 넣고 만들며 메주를 맑게 띄우고 달일 때 갱엿을 넣는다는 것이 종부의 설명이다. 화려한 손님상을 내었을 때 손님이 숟가락으로 간장을 살짝 찍어 맛보도록 권한다. 위나 식도의 긴장을 풀고 침이 잘 나오게 해서 소화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 만 다섯 살,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받는 외상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나주반에 고기 찬이 중심을 이루는 외상을 차려준다. 잡곡밥과 곰국, 김부각, 가시 바른 조기구이, 떡갈비, 장조림, 숙주나물, 반동치미가 오른다.
외상을 받은 아이가 밥을 먹을 때 할머니, 어머니들은 곁에서 고소한 양념을 해서 금방 숯불에 구운 조기살을 바로 발라서 아이의 밥숟갈에 얹어주곤 했다. 남파 가문에서는 집안의 아이가 자라 만 다섯 살이 되면 외상을 차려주었다.
종손도 외상을 받고 가슴속에 뿌듯함이 차올랐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대접해준다는 표현이었다. 이 댁 종손이 받았던 소반과 외상 상차림이다.
▪ 반동치미
모든 재료가 동치미의 반이라서 붙인 이름으로 전라도 일대에서는 싱건지라고도 부른다. 설전에 먹는다. 중간 크기의 무와 배추를 골라 세로로 십자로 자른 다음 소금을 뿌려 한나절 절인다.
그 안에 생밤채, 마늘채, 채 썬 당근, 파, 쪽파, 미나리, 굴, 조기살, 무 등과 갈아놓은 새우젓을 넣고, 약간의 고춧가루를 버무려 항아리에 쟁여둔다.
이때 사과와 배 조각, 청각을 사이사이에 끼워둔다. 쟁여둔 동치미김치 위를 자른 납작 무로 막고 맨 위에 우거지를 덮는다. 생수에 소금을 타 물을 만들고 새우젓국물을 끓여 섞어 두었다가, 3일 후에 동치미 위에 부어준다. 슴슴하면서도 깊은 맛이 개운하다.
▪ 나주집장
보리밥을 지어 메줏가루를 넣고 소금 간해 잘 버무린 뒤 고춧가루, 고춧잎, 고추를 섞어 따뜻한 곳에서 숙성해두어 만든다. 감칠맛이 일품인 찬이다.
▪ 홍어찜
나주 영산포홍어는 유명하다. 조선후기의 학자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나주인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데, 탁주 안주로 곁들여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래된 발효음식으로 전통과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홍어에 간장, 깨, 파, 참기름 양념을 발라 찐다.
▪ 낙지꾸리
낙지꾸리를 인근지역에서는 낙지호롱구이라고도 한다. 손질한 낙지머리를 볏짚에 꿰고 다리를 꼬아 볏짚에 만 다음, 간장에 파, 마늘, 깨소금, 참기름을 넣은 양념을 발라가며 굽는다.
▪ 깨송이부각, 김부각
들깨송이에 설탕, 참기름, 소금을 넣은 찹쌀풀을 살짝 입혀 튀겨낸다.
▪ 육전, 고추전, 방앗잎전
육전은 쇠고기 안심이나 등심처럼 부드러운 부위로 골라 창호지처럼 얇게 저며 달걀옷을 입혀 지져낸다. 고추전은 풋고추의 배를 갈라 그 안에 다진 쇠고기와 채소들을 넣은 뒤 달걀옷을 입혀 지지는데, 팬에서 달걀옷을 김밥 말듯이 돌려가며 얇게 입히는 것이 독특하다.
▪ 명란젓, 토하젓, 창란젓
명란젓은 입맛을 돋우고, 민물새우로 담근 토하젓은 소화를 도우며, 창란젓은 깊은 맛을 낸다.
♣ 가난한 학생들 배움의 뜻 키워주던 손길로 종가를 이끄는 강정숙 종부
강정숙(姜定淑, 61세) 종부는 해남에서 4남1녀의 귀한 외동딸로 자랐다. 대학을 졸업한 뒤 한별고등공민학교 설립자 박준삼의 뜻에 감동하여 대도시의 삶을 포기하고 이 학교 교사가 된다. 존경하던 설립자는 자신의 손자를 인생의 반려자로 소개해주었다.
종부는 시조부님과의 애틋한 추억이 많다. 시조부님은 건강한 사람이 구걸을 오면“육신이 멀쩡한데 일을 하지 왜 얻으러 다니느냐?”며 불호령을 내렸다. 그러나 고학생이“학비가 없습니다. 도와주세요”하면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학비를 보태 주었다고 한다.
당시 학비가 없어 학업을 포기했던 학생들이 학비걱정 없는 이곳에서 꿋꿋이 배움의 꿈을 키웠다. 종부는 제자들과 함께 모를 심고 보리를 베며 받은 품삯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일이 지금도 오롯이 가슴에 남아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작년 84세의 일기로 작고하신 시어머니 임묘숙 노종부와도 남다른 추억이 있다. 아이를 가져 입덧이 심할 때 시어머니가 남몰래 떡갈비를 해주신 것이다. 다른 음식은 냄새만 맡아도 속이 거북했는데, 그 떡갈비만은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뱃속에서부터 떡갈비 맛을 본 두 아들 역시 떡갈비를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조부님의 손길이 녹아있는 고택을 관리하는 일은 이젠 종부의 몫이다. 어르신들이 다 돌아가시고 자식들까지 자라서 고택을 떠나 고택을 관리하는 게 벅차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가끔 외국에서 방문한 손님들이 고택의 아름다움을 극찬할 때는 마치 애국자가 된 듯 가슴이 뿌듯하다고 종부는 말한다.
또 고택의 건축양식을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을 만날 때는 보존 관리를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하룻밤을 묵으며 머리를 식히러 오신 손님들을 만나면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가 싶어 힘든 것도 잊는다고 말한다.
♣ 독립정신이 살아 숨쉬는 민족사학의 산실
조선 인종 때 밀양 박씨 청재공파의 나주공 박부동의 고조부께서 나주의 지방관헌을 맡으면서 경기도에서 나주에 자리를 잡았다. 박부동의 조부 청재공 박심문은 조선초 세조 때의 문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1884년(고종 21년)에 지어진 고택을 지금까지 살뜰히 보존하고 있는 이는 박중근 선생의 9대 박경중(朴炅重, 65세) 종손이다. 이른바 남파고택(南坡古宅)으로 유명한 이 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63호로 등재 되어 있다.
종손의 4대조 남파 박재규가 초당채를 짓고 살림을 시작한 이후 한채씩 늘린 안채, 바깥사랑채, 아래채, 헛간채, 바깥행랑채, 문간채 등 총 7동은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상류계층의 가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댁의 가치는 눈에 보이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박경중 종손의 조부 박준삼은 열렬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유학하던 그는 스물한 살 때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옥살이를 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에도 신간회 나주지회 상무위원,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나주협동상회를 만들어 일본상인들의 상권과 경쟁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한편, 가난한 아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사재를 털어 1960년 나주 한별고등공민학교의 문을 열었다.
1982년 국가 정책으로 영세민 교육비가 지원되면서 한별고등공민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폐교한 그 자리에 종부는 한별유치원을 설립하여 그 맥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