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새신랑이 친척이며 동네사람들이 모여 이불 짓는 자리에 음식을 준비해 와 인사를 전한다. 제주의 혼례는 하루이틀 잔치가 아니다. 일레잔치, 이레를 치르는 잔치다. 이불은 벌써 보름 전부터 짓기 시작한 것.
찾아온 신랑에게 이불 짓던 사람들이 덕담도 하고, 자리를 뜨려는 그를 불러 세워 노래 한 곡 내놓으라 성화도 부린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말로‘정말 애쓰셨습니다’는 뜻이다. 혼례 3일 전 돼지를 잡고, 잔치 전날 삶아낸다.
돼지 삶은 국물로 몸국을 만들어 함께 나눈다. 마을 사람들은 따로 밥을 해먹지 않고 잔치 있는 집에서 물을 긷고 일손을 거들면서 같이 밥을 먹는 것이다.
평소 먹던 보리밥 대신, 잔치 즈음엔 보리에 쌀, 팥을 넣어 지은 초불밥을 몸국 한사발과 먹는다. 혼례에 따라 치르는 잔치는, 전날의 가문잔치, 혼례 당일의 잔치, 신부 집에서 사돈잔치와 신랑 집에서 사돈잔치까지 양가에서 세 번씩 합계 여섯 번 잔치를 연다.
♣ 혼례의 주인은, 쌀계를 들고 물 부조한 마을 사람들 모두
새각시상은, 혼례 날 신부가 신랑 집에서 받는 격식을 갖추어 차린 상이다. 새각시상 받는 자리에는 신부의 가장 친한 친구, 다복한 손위 동서나 예펜 삼촌(숙모)이 함께 나서 일을 거든다. 신부상은 아무리 무거워도 일단 들면 신부 앞에 내려놓을 때까지 절대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신부는 대반이 상아래 밥을 떠놓은 뒤, 떠주는 밥 세 숟가락 정도만 먹고 상을 물린다. 신부가 남긴 상의 음식은 대반이 방문 앞에 구경하는 아이들 손에 한 숟가락씩 떠 준다. 닭 대신 상에 올린 삶은 달걀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 마을사람들이 함께 치르는 혼례날 새각시상과 상객상
제주에는 종가를 찾기 어렵다. 재산도 제사도 평등하게 나눈다. 음식도 그렇다. 계절에 나는 식재료를 써, 간단한 조리법으로 담백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섬이라는 척박한 환경을 이기기 위해 공동체 전체가 터득한 생존방식이다. 이것이 제주음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오신채만 빼면 사찰음식과 같게 되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요즈음의 화두, 로컬푸드며 슬로푸드이다. 제주향토음식연구가 김지순 선생이 재현한 혼례의 상차림은 그가 경험하고 지켜본 것이다. 1950년대 신부와 함께 신랑댁을 찾은 상객에 올리는 상객상과 1960년대 새각시상이다.
▪ 생선튀김
우럭이나 도미를 쓴다. 입을 통해 내장을 빼내 손질한 생선에, 소금 간한 밀가루 반죽으로 눈코가 안 보일만치 두텁게 튀김옷을 입힌다. 튀기고 바로, 꼬리가 살짝 들리도록 들어주어 상에 내었을 때 화려하게 보이도록 한다. 기름을 아끼느라 곧바로 고구마를 튀긴다.
▪ 달걀완숙
달걀완숙은 닭 대신 상에 올리는 것이다. 아직 혼인하지 않은 색시한테‘독새기(달걀) 언제 먹여줄래’묻는 것은‘결혼 언제 할래’하고 묻는 것과 같다.
▪ 미수전
완자전과 비슷하다. 돼지고기 자투리를 다져서 소로 넣는다. 흰자 노른자를 전병처럼 부쳐 소를 싸서 만든다. 어느 쪽이 머리인지 꼬리인지 알 수 없다 하여 미수(尾首)전이라고 한다.
▪ 돼지갈비찜
돼지갈비를 찜으로 조리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고명을 올리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지 고춧가루 살짝 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에 돼지고기가 많은 이유는 잔칫날은 어김없이 돼지를 잡기 때문이다.
▪ 돼지갈비 무국
돼지갈비를 꼭 써서 무를 넣고 시원하게 끓였다. 신부 상객에게는 돼지갈비무국을, 일반손님에게는 몸국을 대접하는데, 간장으로 간을 맞춰 먹었다.
▪ 곤밥과 적
따로 이름이 없다. 돼지고기와 고구마튀김, 달걀전과 닭다리를 꼬치에 꽂아 곤밥 위에 올려 내었다. 상객은 꼬치의 음식을 먼저 먹고, 나중에 밥을 먹었다. 1950년대 눈이 꼬득꼬득 내리던 어느 겨울, 김지순 선생은 친구 들러리로 따라가 받은 상객상에서, 곤밥 위에 큼직하게 올려낸 이 음식을 보았단다.
▪ 간전과 메밀전
돼지 간을 얇게 저며 달걀옷을 입혀 부쳐 올리고 그 아래, 메밀전을 쌓아올렸다. 강원도보다 제주가 메밀이 더 많다고 한다. 보리농사가 끝나면 조를 파종하는 데, 8월 말에서 9월 초 태풍으로 쓸려가 조 농사가 안 될 것 같으면 메밀로 마지막 농사를 짓는다.
▪ 고구마튀김
고구마는 일제강점 시기에 들여왔다. ‘감저’라는 이름으로 제주에 뿌리내린 것이다. 제주에서는 정작 감자를 지실(地實), 땅속의 귀한 열매라고 부르는데,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에 감자를 대신해, 주린 배를 채우게 해주었다.
♣ 난생처음 만난 서울음식에서 제주음식의 가능성을 엿보다 김지순 명인
제주도 향토음식명인 제1호, 바로 김지순 선생(75세)이다. 1985년 제주에서 처음 문을 연 김지순요리학원 원장이기도 하다. 그는 신교육을 받은 친정어머니 덕에 제주 토속음식이며 동서양의 다양한 음식을 두루 경험하며 유년을 보낸다.
그의 친구들은 아직도 그의 집에서 어머니로 부터 대접받은 그 시절‘애그밀크’이야기를 하며 추억하기도 한다. 제주 음식과 각별한 인연은 제주에서가 아니다. 뭍에서부터다. 이화여대 화학과에 입학해 상경한 그는 선생의 집안과 인연이 깊은 서울 모 기업의 부사장 댁에 머물게 된다.
그 댁 뒤채 작은방에 조리사 할머니가 기거했다. 제주의 음식과 사뭇 다른 서울 음식을 맛보고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그는, 오히려 제주음식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 가정과로 옮긴다.
이제부터 그의 남다른 제주 향토음식 이야기가 풀어지기 시작한다. 졸업하던 해 1월 제주출신 남편과 만나 혼인한 그는 대학을 마치고 서울생활을 하다, 1960년대 후반 고향으로 향한다. 한국식생활개발연구회 제주지부장을 맡고, 대학에 출강하며 제주 향토음식 발굴에 나선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방학과제로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제주음식을 모으게 했다. 1983년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6개월 동안 미주를 횡단하면서 한국식생활개발연구회 LA지부장으로 교포들에게 음식조리강습회를 열었다.
모두 고 왕준련 선생님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그는 마침내 요리학원을 연다. 그의 듬직한 원군은 둘째아들 양용신(47세)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 부원장 내외와 선생 그늘에서 15년을 도와온 고명선 씨다.
1970년대 혼분식 장려운동에 분주하며, 새마을짜장 보급에 앞장섰던 그의 기운은 아직 여전하다. 그 기운이 이제는 제주 향토음식연구를 집대성하고 후대를 위해 잘 기록하는 일로 향해있다.
♣ 바람과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만들어온 제주의 초가와 돌담
건축물, 특히 집과 같은 주거 양식은 오랜 시간 동안 자연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만들어온 역사적 산물이다. 제주도 초가는 바람에 순응하거나 싸워온 제주인의 삶 그 자체다. 제주의 초가는 한라산 기슭 초원에서 나는 자연 재료인 새(모, 茅)를 이용해 올린다.
자연 소재라 2년에 한번 10~12월 초 사이에 새롭게 인다. 지붕을 이을 때는 자(子), 오(午), 묘(卯), 유(酉)날을 피하는데, 이 날 지붕을 손보면 화재나 재앙이 집안에 생긴다고 믿었다.
새를 펴고 그 위를 새 줄로 그물처럼 얽어맨 지붕은 제주의 거센 바람에 대항하며 살아온 삶의 역사를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돌담은 고려 의종(毅宗) 때 제주에 판관으로 부임한 김구(金坵)가 밭의 경계가 애매모호하여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쌓기 시작해, 밭이나 집 울타리로 쌓게 되었다고 한다.
바람·돌·여자가 제주의 삼다(三多)로 표현되는 것처럼, 돌은 제주 어느 지역에서나 구할 수 있는 재료이다. 돌담은 실질적으로 바람의 속도를 완만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제주 초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건물 배치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배산임수(背山臨水), 사국형성(四局形成)을 따른다. 안거리(안채)를 중심으로 밖거리(바깥채), 모거리(안채와 바깥채에 대하여 모로 배치된 건물), 눌굽(낫가리를 놓는 장소)으로 이뤄진다.
구성원의 주거 형태는 뭍이‘안채는 여성, 사랑채는 남성’으로 성별에 따라 공간을 분리하는 것과 달리, 제주는‘안거리는 부모 세대, 밖거리는 자녀 세대’로 세대에 따라 공간을 나누어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