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인당은 103년 내력을 가진, 전주시 교동 한옥마을의 대표 고택으로, 수원 백씨 인제공 백낙중 종가의 종택이다. ‘2011 학인당 국악제 가을소리 국악공연’플래카드가 종택 담장에 붙어 가을볕에 펄럭인다.
며칠 전까지 이 댁을 감싸고 신명을 부렸을 우리 소리들의 자취가 아직 기세를 남기고 있다. 학인당은 판소리 공연장으로 기획된 상징적인 건축물이었으니, 고택 자체가 큰 소리 울림통 역할을 한다.
마루에 앉거나 서서 노래를 할라 치면, 그 소리가 건물 안 구석구석은 물론, 앞·뒷마당에 고루 스미며 울려 댄다. 웬만한 소리꾼도 울고 간다는 귀명창의 고장, 전주가 아니던가. 그 천변만화하는 소리판에 끼어 뭇사람들 또한 심금을 마구 울려댔을 것은 물으나 마나.
예향의 고장 한복판에서 권세를 누리기보다 지역의 문화예술인을 찾아 양성하고 소리판을 마련해 기운을 북돋워 온 것이니, 임방울·박녹주·김연수·박초월·김소희 명창 같은 소리 손님이며, 종가를 찾는 귀한 손님 맞이에 특히 종부의 하루가 짧았을 것이다.
♣ 4대 내림효자의 기운으로, 세상을 챙겨온 모심상
내림으로 지극한 효를 실천한 가문답게 시어른 모심상차림 또한 건강은 물론 입맛을 돋우고 먹기 좋게 잘 다져 내는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심상차림은 한채, 맛나지, 누르미, 생합작(대합전), 쇠고기 전골, 미나리물김치 등을 차려 올렸다.
♣ 효의 내림이 상차림에 고스란히 스며, 차리는 손길이 분주하다
전주 고사동‘영화의거리’에는 효자정려각이 있다. 현종 때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제수 받은 이 댁의 규방(奎邦) 어른을 비롯해, 진석(晋錫), 행량(行良), 응만(應晩) 어른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차례로 세워진 것이다.
인제공 백낙중 선생 또한 뛰어난 효자로, 고종 황제로부터 승훈랑(承訓郞)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고‘효자승훈랑영릉참봉수원백낙중지려(孝子承訓郞英陵參奉水原白樂中之閭)’현판을 하사받아 학인당 솟을대문에 걸었다.
이 댁은 내력이 분명한 효의 가문이다. 이 댁의 상차림에는 그 내림이 음식의 재료를 고르는 손길부터 매만지는 손길까지 섬세하게 스며있다.
▪ 한채
늦가을 무와 석류가 나오는 시기에 해먹는 시원한 무채 김치이다. 채 썬 무를 바로 소금 간을 해서 버무려 놓는다. 배는 얇고 납작하게 저민다. 배는 나중에 모두 같이 버무릴 때 넣어야 깨지지 않고 모양을 간직한다.
생강 채를 쳐놓고, 밤도 얇고 납작하게 저며 놓는다. 쪽파도 잘게 썰어놓는다. 갖은 재료 손질이 마무리되면 이미 간해 놓은 무와 함께 버무려 그릇에 담는다. 석류는 마지막에 한채 위에 올려 시큼한 맛과 붉은 색감을 더해 준다.
▪ 맛나지
얇게 저민 쇠고기를 살짝 말린 다음 장조림하여 저장성을 높인 음식이다. 저며 놓은 쇠고기에 간장, 꿀, 배즙, 참기름과 반으로 자른 마늘 등을 넣고 졸여서 먹는다. 상차림을 낼 때는 위에 고명으로 잣을 얹는다. 일종의 저장음식으로 필요할 때 꺼내 먹는 건강식이다. 이 댁의 오래 묵은 간장 맛이 맛나지의 맛을 결정한다.
▪ 누르미
타 지역의 적과 다른 독특한 재료를 꿰서 만든다. 쇠고기, 쪽파, 다시마, 고사리, 애호박고지 같은 재료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꼬치에 끼워 달걀옷을 입혀 팬에 지진다.
▪ 생합작
대합전이라고도 부른다. 백합 속을 꺼내 잘게 다진다. 거기에 쇠고기, 호박, 당근, 표고버섯, 다시마를 다져 넣고 버무려 살짝 볶는다. 볶은 갖은 재료를 다시 백합 껍질에 편평하게 담고 그 위에 달걀옷을 입혀 팬에 지진다.
▪ 미나리물김치
일반 물김치 만드는 법과 비슷하다. 간은 소금으로 하는데 이 댁에서는 5년 정도 묵혀 간수를 뺀 것을 쓴다. 찹쌀은 가루로 빻아 끓여서 풀죽같이 해 아주 조금만 섞어 준다. 미나리, 무, 배추, 얇게 저민 마늘에 생강즙을 약간 넣어 만든다. 잣을 살짝 띄워 상에 낸다.
▪ 쇠고기 전골
국이 없을 때 급하게 만들어 내놓는 음식이다. 콩나물, 두부, 쇠고기를 다져서 간장 양념한 것, 파를 전골그릇에 담아 끓인 후, 달걀을 노른자가 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풀어 모양을 낸다.
♣ 종택을 문화와 예술의 중심으로 올려놓는‘기획자’의 삶, 서화순 종부
“얼굴 하얀 여자가 우리 집안을 일으키니, 그대와 나는 천생연분이요.”요즘같은 세상에 이런 말로 청혼을 할라치면 어떤 사태가 벌어 졌을까? 그런데 인재공 종가의 서화순 종부(54세)는 달랐다.
물론 시동생들까지 나서‘종가의 시집살이는 없을 것’이라는 설득이 막판 변수이기는 했지만, 1년 반을 걸려 전주 교동의 내로라하는 백씨 종가에 발을 디디기로 결정하고 만다. 종부는 김제 달성 서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시조부님 건강 탓에 혼례를 서둘렀는데, 약혼 뒤 바로 세상을 떠나셨다.
스물다섯 살 종가의 새댁은 시집오자마자 1년 상을 치른다. 보름마다 산더미 같은 전을 부치며 종가의 일상을 시작한 것이다. 100년 가까이 된 고택에서 보낸 처음 10년은 암울했다.
외출이 거의 없는 생활, 쓸고 닦는 데 일과의 전부를 써야 하는 황망한 종택, 시아버님부터 남편, 시동생, 아이들, 집안 식구들까지 매일 다섯 번 이상 차리는 아침상까지 종가에서 바라본 전주의 하늘은 그저 회색빛이었다. 종택 탈출 기회가 왔다.
종손(백창현, 59세)의 사업이 어려워져, 일을 접고 잠시 산중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종부는 시어른의 양해를 구해, 아이들과 집을 구해 나오게 된다. 혼자 벌어 아이들과 생활하는‘독립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딱 10년이었다.
산에서 내려온 종손이 다시 종가를 일으키자며 종택 생활을 제안했을 때까지다. 일하기의 고단함보다‘이런 것이 보통 여자들이 꾸며나가는 소소한 삶이구나’ 알게 해준 귀한 시간이었다.
종부는 종택에 들어가 다시 종가의 기운을 살리며 시어른을 모시고 사는 길이 그 앞에 놓인‘유일한’일이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다시 시작된 종택의 삶은, 예전과 달랐다.
10년을 병석에 누운 시아버님 돌보는 일과 함께, 고택체험이며 차 마시기 체험 같이 종택을 문화와 예술의 중심으로 올려놓는‘기획자’의 삶, 어지간한 목수 못지않은 고택전문가의 길이 열린 것이다.
♣ 백범 선생의 자취가 생생한 종가의 종택, 학인당
해방이 되고, 백범 김구 선생이 한독당 전북도당 창당을 위해 전주를 찾았다. 구름떼 같은 인파가 몰렸다. 그날 백범 선생은 학인당에서 하루를 묵는다. 학인당은, 아들에게‘만석꾼 재산보다는 수백 년을 갈 집’을 선물한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이 담겨 있다.
103년 전, 이 종택을 지을 당시 돈으로 4,000석의 공사비를 들였다. 백두산과 압록강, 오대산 일대에서 최고급 목재(주로 홍송)를 구해왔다. 또한 처음 건축을 시작한 백진수 어른이 대원군과 절친했던 터라, 궁궐 건축에 참여한 도편수와 대목장을 불러, 2년 반 시간을 들여 지었다.
우리 한옥의 근대적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집이다. 집의 전면은 모두 창을 냈으며 지붕의 정면에 돌출시킨 박공면에도 창을 내어 다락의 채광과 환기를 꾀한 2층 구조의 집이다. 내부는 복도로 연결되어, 개방되어 있되, 합리적인 공간구조를 보여준다.
뒤안 뿐 아니라 집 앞에 정원을 낸 것은‘땅샘(우물)’때문이다. 여전히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자연냉장고다. 백창현 현 종손은, 종가나 종택이 살아있고, 깨어있으려면, 사람이 드나들어야 한단다. 과거 종가의 종택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학인당을 전주의 예술, 음식 문화의 중심으로 새롭게 부활시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문화의 깊은 맛을 이 학인당을 통해 체험하게 할 작정이다.
특히 종가에서 담백한 음식체험을 통해 우리 전통의 맛을 느끼게 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학인당은 마지막 공사 중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학인당이라는 매개를 통해 전주문화의, 종가의 향기에 취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