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름 낚싯대 드리우는 자리’, 초간정에 걸린 현판 석조헌(夕釣軒)이 가진 뜻이다. 초간정은 경북 예천 용문면 죽림리, 찻길에서 벗어나 작은 내를 건널새라 물이 휘돌아가는 어귀 암반 위에 고졸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초간정의 주인이 예천 권씨 초간 권문해 선생이다.
선생은 일찍이 퇴계문하에서 수학해, 영남학파 주류로 예천 권씨 명성을 떨친 분이다.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지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저술이 이 초간정에서 이루어졌으니, 해거름 낚싯대를 드리우고 낚은 것은 단군이래로 그가 글감으로 삼은 우리의 역사, 인물, 문학과 예술로부터 나무이름, 풀이름에 동물이름까지 사사건건한 모든 것이다.
초간 선생 종가의 종부들은 종택과 초간정을 오가며 세상 시름과 정세를 잊고 마음을 닦아온 종가 어른들의 기운을, 밥상을 통해 북돋웠을 것이다.
♣ 시조부님 폐장의 기운을 북돋는 조약상과 다과상차림
초간 권문해 선생 종가의 조약상차림은 매작과, 인삼정과, 생강절임, 편강 등을 조약과 함께 내어 잔기침이 끊이지 않았던 시조부님의 기운을 보하던 약상이다. 더불어 차좁쌀감주에 다식과 매작과, 기지떡을 함께 올리는 다과상 상차림이다.
♣ 시조부님께 올린 약상과 다과상
예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시조부님은 그 탓에 병치레가 잦았다. 특히 천식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고생하셨다. 이재명(72세) 종부가 시집와서 10년을 같이 사시다 돌아가셨다. 시집와 처음 배운 것이 시조부님께 올리는‘조약’만드는 법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새 물을 길어 짓는 조약은, 모든 재료를 껍질째 달인다. 우러날 게 생강 밖에 없으니 두어 시간 달이면 된다. 한 번 달여 놓으면 따뜻할 때는 따뜻한 대로, 식으면 식은 대로 가까이에 두고 차처럼 드셨다. 조약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밤중에라도 끓여 드렸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시조부모님, 시어머님이 계셨고 일꾼도 두 명 있었다. 그때 건진국수를 많이 했는데, 곱게 썰어서 삶아 따뜻한 국물에 여러가지 고명을 얹어 내면 시조부님이 좋아하셨다.“이거는 야야, 대통령이 와서 접대해도 손색이 없다”하실 정도로 칭찬을 많이 해 주셨다.
예전에는 철마다 음식 재료 준비로도 일 년이 지났다. 그러니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했다. 불천위 세 내외분을 포함해 일 년에 열두 번의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잔치나 결혼식이 있는 해에는 그 준비에 손이 더 필요했다.
▪ 조약
조약은‘조약거리다’, ‘만들었다’라는 의미다. 댓잎, 박속, 은행, 밤, 생강, 차조기잎을 넣고 달인 물이다. 차조기잎과 박속은 말려뒀다가 사철 썼다.
▪ 인삼정과
인삼을 살짝 쪄서 조청에 조린다. 너무 많이 조리면 딱딱해지므로 색이나 상태를 봐가며 조려야 한다.
▪ 생강정과
생강을 편으로 썰어서 소금물에 데쳐서 꿀을 넣고 조린 것이다.
▪ 편강
생강을 편으로 썰어서 설탕에 조려서 말린 것이다.
▪ 매작과
밀가루에 소금과 생강즙을 넣고 반죽해 얇게 민 다음 직사각형으로 썰어 가운데를 뒤집어 리본처럼 만들어서 튀긴 후 조청에 버무린다. 잣가루를 고명으로 뿌린다.
▪ 차좁쌀감주
차좁쌀로 밥을 지어 뜨거운 김이 나가면 엿기름물을 넣고 생강을 많이 넣어 따뜻한 곳에서 삭힌다. 생강이 많이 들어가 기침이나 천식에 좋다.
▪ 다식
송화와 흑임자, 쌀가루에 조청이나 꿀을 넣고 반죽해서 다식틀에 찍어낸다. 요즘에는 다식이 작아졌지만, 예전에는 다식도 큼직큼직했다. 음복할 때는 둘 또는 네 조각으로 쪼개서 음복했다.
▪ 기지떡(증편)
멥쌀을 곱게 빻아서 탁주하고 콩물(콩을 갈아서 즙을 짜서)을 넣고 반죽한 뒤 면포를 덮어 따뜻한 곳에서 발효시킨다. 주걱으로 뒤섞으면 기포가 빠지며 부르르 소리가 난다. 가마솥에 채반을 놓고 짚을 깔고, 면포를 놓고 떡을 찌는데, 떡이 부풀어 오른다.
고명으로 밤, 콩, 차조기잎(소엽), 맨드라미꽃, 목백일홍꽃, 검정깨를 올린다. 봄에는 진달래, 가을에는 국화 노란잎을 떼 놓기도 했다. 제사때 주로 만들던 떡이다. 발효된 떡이라 탈도 안나고 밥 대용으로 좋다.
♣ 친정도 종가, 시집도 종가, 천상 ‘종부’ 이재명 종부
곤궁했던 종가 살림살이에도 집안에 걸인들이 밥을 얻으러 오면 한가득 양식을 담아 보내주곤 했다는 이재명 종부(72세)는 1963년 안동에 있는 진성 이씨 주촌 종가에서 시집왔다. 넷째 딸이었다. 10월에 혼례를 하고 이듬해 3월에 신행을 왔다.
그때는 신랑이 초행을 왔다가도 3일만에 재행을 왔다. 재행을 오면 이웃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랑이 본가로 갔다가 날을 받아서 다시 삼행을 온다. 삼행까지 마치고 나면 신부가 신행을 가기 전까지 신랑이 신부집을 오갔다.
신행 올 때 원삼족두리에 연지곤지 찍고 집안 어른들과 조상께 헌구례를 드렸다. 지금으로 치면 결혼식날 하는 폐백이다. 친정에서는 설이 되면 안동식혜를 몇 단지씩 담그고는 했다. 시집을 오니 예천사람들은 식혜를 안 먹었다.
그것 말고는 친정도 종가인데다 제례법이나 음식도 안동이나 예천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특별히 시집살이랄 것은 없었다. 아버님이 집에 안 계시고, 시어머니도 편찮으시니 혼례를 치르자마자 살림을 물려받아야 했다.
남편은 법대를 졸업했지만 일꾼들 데리고 농사지으며 집안 건사에 힘썼다. 할아버님께 살림을 바로 물려받아야 하니 어디 가지도 못하고 집을 지켜야 했다. 13대 권영기(73세) 종손과 사이에 아들 형제와 딸이 있다.
외동딸(권재정)을 봉화 닭실마을 안동 권씨 충재 권벌 종가에 시집보냈다. 종가의 음식이야, 친정댁과 시댁의 손맛이 그를 통해 내림으로 두루 만나는법. 가끔씩 찾아와 음식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한다.
♣ 우리나라 최초 백과사전 저술한 초간 권문해 선생
정감록에서 꼽는 우리나라 십승지지 가운데 하나가 금당실이다. 옛말에‘금당맛질 반서울’할 만큼 물산이 풍부했던 금당실의 개울 건너편에, 예천 권씨 초간 종택이 있다. 초간 종택 어귀에는 50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향나무가 있다.
울향(鬱香)나무라고 불린다. 초간 선생의 조부 권오상 선생이 전남 해남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온 향나무로 알려져 있다. 예천 권씨 종가 별당은 권오상 선생이 지은 것으로 보물 제 457호다. 사랑채 누마루에 오르면 너른 들판이 굽어보인다.
사랑채와 안채는 단 차이가 있어 안채의 기단이 사랑채보다 한 층이 높다. 사랑채는 안채에 있는 안사랑채와 건물 뒤쪽의 계단과 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집안에는 장서각인 백승각이 있어 초간선생의『대동운부군옥(大東韻部群玉)』의 판목 677매와 14대째 전하는 옥피리 등을 보존하고 있다.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 선생은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대수마을’출신이다. 권지(權祉)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박식하기로 이름났던 부친한테서 교육을 받았다. 스물일곱에 과거 급제한 후 중앙과 지방에서 여러 벼슬살이를 했다.
그러는 사이 당쟁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나 항상 청렴과 정직을 신조로 삼았다. 초간 선생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저술이다.
수천 년 이래 우리나라 모든 책을 참고하여, 단군부터 당시까지의 모든 역사적 사실, 인물, 지리, 문학, 예술 등을 총망라하고 이것을 운자에 따라 배열한 책 20권을 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격으로 임진왜란 이전 역사적 사실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