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부터 가을 초입까지 과천문화원에서는 특별한 유물전시회가 열렸다. ‘과천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다. 전주 최씨 평도공 최유경 선생 종가의 최종수 종손이 500년 내력을 가진 집안 유물과 30여 년 동안 모은 과천 관련 생활사 유물 12,000여 점을 과천문화원에 기증하면서 열린 기증유물전이다.
그 한켠에서「응달말」이라는 잡지 더미를 만났다.「응달말」은 최종수 종손이 내는 가족잡지이다. 1년에 한번 가족 이야기를 담는 잡지는 그 제호가 경기도 과천시 막계1리 응달말에서 유래했다. 응달말은 종가의 종택이 있던 전주 최씨 집성촌이었다.
그러나 지난 1977년 서울대공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되고 만다. 그 아쉬움이 가족잡지 제호로 이어진 것이다.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최씨 집안으로 시집온 조용기(71세) 종부의 삶은, 시어른의 병수발로 시작되었다. 병중인 시아버지 식사도 자연, 소화가 쉬운 부드러운 음식들로 차려내었다. 대표적인 음식이 갖은 죽과 삶은 무김치이다.
♣ 병치레 잦은 어르신 위한 죽상 상차림
사골김치죽, 아욱죽, 잣죽, 전복죽, 사골 흰죽에 팥죽과 콩죽, 호박죽과 무죽까지 아홉 가지 갖은 죽에 배추김치, 삶은 무김치, 깍두기, 나박김치를 곁들였다. 식사를 마친 다음, 식혜와 수정과로 상을 물렸다.
♣ 응달말, 깊은 골에서 우려낸 곰탕국물과 소박한 채소 반찬
전주 최씨 평도공 종가의 종택 자리는 지금 서울대공원 동물원이 되었다. 아직 종택이 위엄을 차리고 그 자리에 곧게 자리하고 있을 때 이야기다. 골 깊은 청계산 그늘에 놓인 마을, 대대로 곰탕을 만들어 어르신 보양식을 삼았다. 꼬리곰탕, 사골곰탕, 양탕 같은 음식이 장수식품으로 대를 이어 왔다.
골이 깊으니, 다니는 차도 적고, 육류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연, 고기반찬보다 호박말림, 무김치, 배추김치, 나박김치 같은 채소 반찬으로 담백한 식단이 자리 잡게 되었다. 조용기 종부의 시어머니 박일채 노종부는 2007년 9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0년 병치레 동안 종부는 사골국물과 갖은 죽으로 편안하게 식사하실 수 있도록 살펴서 봉양했다.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죽 한 그릇을 다 비우시고는,‘너는 죽장사 해도 되겠다. 죽을 이렇게 맛있게 끓여내니……’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치매로 고생하신 그 분이 종부의 음식을 두고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되었다. 그 덕에 죽 맛을 간간히 보았던 손자들이 와서 푸념하곤 한다. “아파서 죽을 사 먹었는데, 할머니 죽 맛이 안 나요.”
▪ 사골김치죽
사골을 푹 고아 기름기를 없앤다. 묵은 김치를 씻은 뒤 곱게 다져 참기름에 볶다가 사골곰국을 붓고 찹쌀을 넣어 끓인다. 센 불에 끓이다가 끓으면 약한 불에 마저 끓인다. 이렇게 해야 김치죽이 씹지 않아도 목에 걸리는 게 없이 맛이 깔끔하다. 고명으로 김치 채와 통깨와 실파 다진 것을 올린다.
▪ 아욱죽
사골국물에 쌀을 넣고 끓인다. 아욱은 한번 씻어, 왕소금을 듬뿍 넣고 으깨서 파란물이 빠지면 뻣뻣한 아욱잎이 보들보들하게 되는 데, 그 아욱을 넣고 된장을 풀면 된다. 고명으로 아욱이파리와 마른 새우를 올린다.
▪ 잣죽
생수에 불린 쌀을 넣고 끓이다가 다지거나 간 잣을 넣는다. 처음부터 넣으면 잣이 눌게 되니, 한참 끓이다 넣는다. 소금 간을 조금 해 상에 올린다.
▪ 전복죽
전복은 깨끗이 손질해서 내장까지 발라 살과 함께 다진다. 다진 전복을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붓고 찹쌀을 넣는다. 애벌 끓인 뒤 약한 불에 한참 끓이면 된다. 고명으로 당근 잘게 썬 것과 깻잎 채를 올린다.
▪ 사골채소죽
사골곰국에 찹쌀을 넣고 애벌 끓여 약한 불에 저어 가면서 한참 끓이다가 나중에 버섯, 양파, 당근, 피망을 넣고 살짝 끓이면 된다. 고명으로 당근, 버섯, 고추 잘게 썬 것을 올린다.
▪ 숙깍두기
무를 뚝뚝 잘라서 물을 붓고 삶는다. 잘 무르지 않으니 30분 넘게 한참 끓여 푹 뭉그러지도록 한다. 무를 식혀 소금, 새우젓 조금으로 간을 하고 파, 마늘, 생강,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리면 된다. 서울 전통 반가음식이며 사라지는 음식 가운데 하나이다. 이가 상한 어른들을 위해 올리는 음식으로, 효의 의미가 강하다.
▪ 나박김치
홍고추를 갈고 배도 좀 갈아서 베보자기에 국물을 짜낸다. 그 물에 찹쌀풀 약간과 소금으로 간하고, 배추와 무를 썰어 넣으면 된다. 국물을 하루 전에 만들어서 숙성시킨다. 하루 저녁 있다가 무와 배추를 썰어 통에 넣고 그 국물을 부으면 맛이 든다.
▪ 쇠고기완자와 두부전, 두부소박이전
쇠고기완자는 쇠고기, 양파, 당근, 버섯을 다져놓고, 두부는 베보자기에 짜서, 준비한 재료를 함께 넣고 달걀 조금 넣고 소금 간을 조금 해서 완자모양을 내서 지진다. 두부소박이전은 두부 가운데에 고기소와 채소 다진 것을 소로 넣었다. 두부전은 두부에 밀가루 달걀을 입히고 미나리잎을 올려 지진 것이다.
♣ 발안장터 사진관의 사진 한 장이 전주 최씨 종부의 연으로 이어진 조용기 종부
“된장이 몸에 좋다고 하는데, 많이 먹는 방법이 따로 있어요.”콩과 보리쌀, 늙은 호박을 푹 고아서 절구로 짓찧는다. 그렇게 만든 것에 짠 된장을 섞은 뒤, 가을걷이한 매운 고추의 씨를 빼고 갈아, 같이 섞는다.
항아리에 담아 다음 해 4월까지 밖에서 숙성시키고, 5월부터는 먹을 만치 냉장고에 넣어 먹는다. 짜지 않기 때문에 어린이들도 많이 먹게 된다. 이른바 콩된장인데, 조용기 종부가 슬쩍 전해주는 된장 많이 먹기, 혹은 집안의 아이들에게 된장 많이 먹이기 비법이다.
조용기 종부는 1941년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에서 한양 조씨 아버지와 남양 홍씨 어머니 사이 4남4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둘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내리 넷을 딸을 낳은 터라, 어머니 고생이 안쓰럽고 또 집안에 남자 손이 없으니, 일손이 부족했다.
어린 종부는 일찍부터 집안일뿐 아니라 들일에 자청해 나섰다. 스물셋 나이에, 이웃에 시집와 살던 종손의 누이 소개로 최종수 종손을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약혼사진을 찍게 되었다. 발안장터 사진관에서다.
그리고 혼례를 치르자마자 속절없이 부대로 복귀한 남편 대신, 막계리 시댁 살림을 돌보기 시작한다. 병중인 시어른 수발과 집안 대소사를 치르면서 50여 년 세월을 버티어온 것이다. 그 애틋한 마음을 높이 산 과천 시흥향교로부터 1975년 효부상을, 과천시에서 1991년 과천시민대상을 받기도 했다.
시어른들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그의 손길은 주위 어려운 노인 분들을 향해 있다. 새벽을 마다하지 않고 호출이 오면 거동이 불편한 노인 수발에 나서는 것이다. 그는 매듭장인이기도 하다.
매듭공예 강사자격증을 따서, 무료강습에도 하루가 바쁘다. 친정에서 전통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트럭 타고 설레며 시집을 온 스물세 살 고운 손이, 이제 일흔을 넘겼다. 그 굵어진 손마디에‘사랑’이라는 글자가 스며있다.
♣ 종가의 시련에도 ‘응달말’ 한 뜻으로 헤쳐온 맥계 최씨, 평도 공파 종가
응달말 전주 최씨는‘맥계 최씨’라고도 불린다. 과천시 막계동에 세거하였던 전주 최씨 일가의 별칭인 셈이다. 막계리의 전주 최씨는 시조인 문열공 최순작의 8세손 평도공 최유경(崔有慶) 선생을 파조로 성립한 평도공파다. 막계리에 세거한 것은 평도공 선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500년 세월을 넘게 과천에서 세거한 셈이다. 최유경 선생의 아들 판윤공 최사위 선생은 1404년(태종4년) 황해도 관찰사와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최조 선생은 자헌대부로 형조판서를 거처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직에 나아가지 않고 다만 처사로 과천에 우거했다고 한다.
지난 100년 사이, 막계리 전주 최씨 종가에는 두 번의 시련이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지금 종손의 조부님 대에 가산을 잃어 가세가 기운 것이다. 막계리 인근의 땅 대부분이 종가의 것이었는데, 조부께서 일가붙이의 재판에 잘못 관여하시어 크게 낭패를 당하고 가산의 대부분을 잃은 것이다.
시련을 이겨나가는 데 가문이 한번 더 단단하게 뜻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번의 시련은 지난 1977년의 일이다. 막계리가 서울대공원 부지로 책정되어, 조상의 선영이며 대대로 이어 살아온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이다.
용인시 남사면에 묘역을 조성해 500여 년 동안 막계리에 모셨던 조상의 묘 52기를 이장하고, 묘소 앞 비석 12기는 막계리에 모아 보존하게 되었다. 거주지도 옮겨야 했다. 과천시 문원동 이주단지에 정착하게 된다.
최종수 종손(71세)은 8년 임기를 마치고 과천문화원장에서 물러난 뒤, 현재는 한국문화원연합회장을 맡아, 지역문화 창달의 중심 기관인 각 지역 문화원의 설 자리와 갈 길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2011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