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 나라의 동량(凍梁)으로 자라시게
혼례 뒤 사위가 맞은 첫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음식을 담은 가마 행렬이 길을 나섰다. 사돈댁으로 향하는 길이다. 두감주를 물 함지에 가득 담고, 송죽두견주 항아리, 대여섯 말 갖가지 떡을 해 담은 함지, 송이밥과 송이국, 포식해 같은 음식들. 심지어 장까지 챙긴 행렬이다.
사돈댁 마당에 도착해 야단스런 음식 차림이 이어진다. 음식 재료를 따로 준비해가 무치고 버무리고 간을 맞춰 상을 차린다. 그렇게 막 차린 밥상, 싱싱한 맛과 만듦새가 드러나도록 심사숙고 연출한 잔칫상이 바로‘사위 첫 생일상’이다.
사위 첫 생일상의 중심에 놓인 웃기떡에는 숫자와 색의 배치를 통해 음양오행, 우주의 원리와 조화를 담고 있다. 사람의 조화, 세상의 조화, 우주의 조화를 통해, 사위가 나라의 커다란 동량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 것이다.
① 송이밥과 송이국
추석 무렵 강원도지역에는 진지상에 송이밥이 많이 올랐다. 송이와 어울려 박이 연할 때 함께 국을 끓여 먹었다. 박고지와 양지머리 국물에 애탕 끓이듯이 걸쭉하게 끓여냈다.
② 포식해
부드러운 음식으로 어른상에 올렸다. 삭힌 음식이라 소화가 쉽다. 예전에는 소식해라고 해서 하얗게 했다. 종가에 이어지는 제사, 여러 가지 포들이 쌓인다. 제사 뒤 남은 포에 무를 아주 잘게 썰고 고춧가루, 엿기름을 넣어 김치를 만들었다. 우리 할머니들의 지혜로운 생각이 담긴 음식이다. 그렇게 해서 어른들 진지상에 올린다. 오로지 엿기름으로만 삭힌 음식이다.
③ 송죽두견주
종택 주변 작은 숲을 300년 동안 대나무와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그 숲 비탈에 봄이면 피어나는 진달래까지, 송죽두견주는 우리 할머니들이 집 곁에서 나는 것들로 지어냈다‘. 로컬푸드’답게, 종택에서 벗어나지 않고 지어낸 술이다. 맑게 청주로 뜬 것은 제주로 쓰고, 탁한 것은 농주로 쓴다. 술 항아리에 술이 숙성되기 전에 솔잎, 댓잎을 넣었고, 봄이면 진달래꽃, 가을에는 국화를 함께 넣어 숙성시켰다.
④ 채나물
콩나물국에 메밀묵, 고사리, 시금치를 넣어 만든다. 어린 김장김치를 넣기도 하고 고사리 대신 말린 가지오가리를 넣기도 해 철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떡을 먹을 때 목이 메니, 목을 축이느라 함께 먹는다. 콩나물국은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데, 원래는 무채를 넣어 시원하게 맛을 내기도 했다. 함지 아래 무채, 고사리, 시금치 같은 나물들을 놓고 소적판을 위에 얹어 사돈댁으로 옮겨간 뒤, 함께 무쳐서 상에 올렸다.
⑤ 웃기떡
치자와 맨드라미 물을 들인 색색 편의 위에 얹었다고 해서 웃기떡이다. 위에 덮는(蓋)다는 뜻의‘윗개’가 변한 것이었을까, 어림잡아 본다. 색을 나누고 잘 모아서 동그랗게 환을 만든 뒤, 납작하게 눌러 여러 모양을 낸다. 지금은 태극 모양의 두세 가지 색만으로도 그럴듯한데, 옛 할머니들은 12가지까지 색을 내기도 했다.
⑥ 두부찜
예부터 잔치준비에 두부와 묵만들기가 빠질 수 없는 큰일이었다. 서지 조진사댁에서는 직접 농사지은 콩과 동해 바닷물 간수로 담백한 두부를 만들었다.
⑦ 송이느리미
송이와 절인 배추, 대파 소고기 등을 꼬치에 끼워 기름에 지진 뒤, 간장 양념으로 졸인 음식이다. 느리게 만들고 먹는다 하여, 느리미다. 붉은 고추가 들어가는데, 제사에는 올리지 않는다. 축하할 때는 색을 맞추느라 화려하게 색을 부린 것이다. 예전 선비들 상차림에는 고춧가루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고춧가루가 든 음식은 농사일바라지 음식이다.
⑧ 문어무침 ⑨ 대추약식 ⑩ 쇠고기너비아니 ⑪ 명태찜
동해안지역 상차림에 빠질 수 없다는 문어를, 숙회로 살짝 익혀서 조리한 문어무침과, 밤, 대추와 곶감이 들어가 잔칫상에 빠질 수 없는 대추약식과 쇠고기너비아니, 명태찜이 있다. 그밖에도 두감주가 있다. 식혜지만 물이 들어가지 않은 밥 같은 식혜다. 큰 함지에 물을 담고 날이 더울라치면, 좀 시원한 기운을 가지라고 연잎에 두감주를 담고 왕골로 복주머니처럼 싼 뒤 물 위에 동동 띄워 간다. 그걸 풀어서 숟가락으로 떠먹는 되직한 식혜다.
♣ 봄에는 못밥, 여름에는 질상, 일하는 사람들의 밥상을 차리는 최영간 종부
서지마을의 봄은 소쩍새와 함께 시작한다. 두견새, 접동새와 같은 이름이다.‘솥쩍다, 솥이 적다’목청을 높여, 궁핍한 마을의 살림살이를 전하는 소리로부터다. 종가의 살림살이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살림살이까지 한눈으로 살피는 것이 종가의 일이었다.
종택 한편에 단아한 글씨가 있다. 여재당, 여재(如在)라는 글자는 그가 시할아버지께 받은 말씀이다. 어머니의 마음과 같이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마음을 담으라 한, 글씨다. 그가 종부로 살아낸 40여 년의 세월이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다. 그 마음이 닿아서일까.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의 첫 방문지로 찾아온 저자 배용준도 취재가 끝났지만 차마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그 뜻이 내림으로 이어진다.
언젠가 종가를 이을 차종손이 종택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날이었다. 마침 앞마당에 눈이 소복했다. 그가 홍운탁월(烘雲月), 그 한 마디를 전한다. 부러 무엇을 하려고 노심초사 끌려 다니지 말고, 자연스럽게 뜻을 정하고 차근차근 길을 걷다보면 스스럼없이 그렇게 되리라는, 그 말 한마디였다.
♣ 창령조씨 명숙공 종택과 서지초가뜰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 264번지, 알뜰한 쥐가 곡식을 모아들이는 형세. 일컬어 서지(鼠池)골이다. 이 초가집에 너른 뜰을 두어‘서지초가뜰’이라 이름 붙인 정갈한 종가음식 상차림을 맛볼 수 있다. 노(老) 종부 김쌍기(85)로부터 종가댁 음식을 전수받은 며느리 최영간(60) 대표가 농한기와 모내기 후 먹는 음식 상차림을 전통 방식으로 개발해 세계인과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