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흔아홉 칸 큰 집안의 이야기는 묵은 장맛에서 나온다
350년 내력을 가진 종가의 씨간장이 아흔아홉 칸 대가의 위용을 떠받치고 있다. 무릇 큰 집안의 이야기는 묵은 장맛부터다. 선영홍 종가에 맛의 바탕이 스며 있다. 종부는 귀한 손님이 찾으면 주안상부터 차려내었다. 음식을 놓을 때는 맛있는 것을 더 가까이 놓아 젓가락이 자주 가도록 했다.
손님상은 외상이나 겸상을 하는 데, 술은 왼쪽에 놓고 대접한다. 외상으로 손님을 대접할 때는 마주보지 않고 옆에 앉았다. 일제강점기 때 선친이 운영한 무료교육기관 관선정의 뜻을 이어, 종손 내외는‘고시원 관선정’을 열었다. 용문(門)에 오르기[登] 위해 부단히 공부하던 이들이 시험에 합격해 다시 찾는다.
금의환향이다. 늦은 책거리를 겸해 술상을 본다. 청포묵, 전, 육회, 육포와 편강, 나박김치, 파강회, 쇠고기완자탕에 취하지 않을 만큼 가양주를 곁들인다.
① 육포와 편강
육포는 쇠고기 우둔살로 만든 것으로 칼이나 가위를 쓰지 않고 손으로 찢어낸다. 편강은 생강을 얇게 저며 설탕물에 조려서 말린 것으로, 육포와 편강은 마른 술안주로 즐겨 먹던 것이다.
② 청포묵
녹두로 만든 청포묵은 손님맞이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충청도는 도토리묵이 유명하지만, 반가에서는 청포묵을 먹었다. 청포묵을 채 썰어 끓는 물에 한 번 데쳐서 만들어야 탱탱하다. 데친 청포묵에 참기름과 간장, 식초로 간한 다음, 볶은 쇠고기와 황백지단, 김을 고명으로 얹는다. 궁에서는 탕평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③ 쇠고기완자탕
새우전을 부치고 남은 껍질과 머리로 육수를 내서 무를 넣고, 버섯, 쇠고기 완자를 넣어 끓인 탕이다. 쇠고기완자는 으깬 두부를 섞어서 밑간하고, 완자를 빚어서 밀가루를 살짝 입혔다. 그래야 부스러지지 않는다. 끓일 때도 국물이 팔팔 끓을 때 하나씩 넣어야 한다.
④ 새우전 ⑧ 간장
손질한 대하를 씹는 맛이 있도록 어슷하게 썰어서 양파, 파 흰 부분, 버섯, 쇠고기 등을 넣고 간을 한 다음 밀가루, 계란을 넣어 반죽해서 한 입 크기로 지져낸 것이다. 아름다운 집이 있는 골짜기, 아당골이라 불리는 보성선씨 선영홍공 종가에는 350년 된 씨간장이 전해온다. 햇간장에 씨간장을 더해 한결 같은 장맛을 이어오고 있다. 발효균을 살리기 위해서 간장을 불에 달이는 과정을 생략하고, 옻나무 숯 등으로 잡균을 막는다. 전통에 보은의 특산 대추를 넣어 장맛을 더욱 새롭게 하고 있다.
⑤ 나박김치 ⑥ 김치
나박김치는 봄, 가을에 먹는 김치다. 겨울에는 동치미(물김치)를 먹는다. 여름에는 나박김치가 맛이 없다. 배추와 무를 납작하게 썰고 사과도 같은 크기로 썰어서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간장으로 간하면 익히지 않아도 맛이 좋다. 충청도에서는 김치를 짠지라 부른다.
⑤ 파강회
계란 노른자 지단과 데친 갑오징어, 당근을 한 입 크기로 납작하게 썰어서 데친 쪽파로 묶은 것이다. 갑오징어 대신 오징어나 쇠고기편육을 쓰기도 한다. 강회를 접시에 돌려 담고 초고추장을 함께 낸다. 초고추장에는 대추고추장을 쓴다.
⑨ 고추장 ⑩ 술
보성선씨 선영홍 종가에서는 보은 특산인 대추를 넣어 고추장을 만든다. 대추를 푹 고아서 앙금을 내려서 고추장을 만들 때 섞어 만든다. 가양주는 찹쌀고두밥에 솔잎을 섞어서 메주콩 50알을 넣어서 숙성시킨다. 겨울에는 보름, 여름에는 일주일이면 술이 익는다.
⑪ 육회
육회는 쇠고기를 채 썰어 대추를 넣어 만든 간장, 설탕, 참기름 등 양념을 넣고 무친다. 채 썬 배를 접시에 깔고 육회를 가운데 담는다. 마늘을 편으로 썰어서 고명으로 얹는다.
♣ ‘고시원 관선정’으로 선친의 교육의지를 되살리는 김정옥 종부
종부는 친정이 전라도 광주다. 시할머님이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이 댁 음식은 종가의 원 고향 전라도의 맛과 시할머님의 고향인 서울의 멋이 합해져 깔끔하고 맛깔스럽다. 거기에 종부의 친정 손맛이 더해져, 이 집 음식 맛을 보려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종가음식, 종가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찾아오기로 한 사람들의 연락처며 일정이 달력에 빼곡하다. 그는 20여 년 전부터 고시원‘관선정’을 운영했다. 돈 되는 일도 아니고, 하루에 수십 명씩 밥 차려주는 일이 녹록치 않다. 그래도 선조의 뜻을 이어간다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더 크다.
맨 처음 고시원을 시작할 때 60명 가까이였다. 운전면허 하나 못 따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아직 대법관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법관, 변호사, 검사, 경찰공무원까지 다양하다.
지금까지 천 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1년 반에서 길게는 5~6년을 관선정의 아침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 아침 그가 다시, 시험준비에 지친 청년수험생들의 든든한 밥상이 된다.
♣ 보성선씨 선병국 고가와 관선정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3번지, 속리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로 생긴 삼각주에 선병국 고가가 자리 잡고 있다. 보성선씨의 원래 고향은 전남 고흥군 금산면이다. 100여 년 전에 18대 손인 영홍공이 명당을 찾아 보은으로 이사했다. 그 집이 99칸짜리 전통한옥 선병국 고가다.
영홍공은 관선정이라는 무료교육기관을 열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후학을 양성했다. 이런 선대의 뜻을 이어서 21대 종부가 20여 년 전부터 고시원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