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먹는 날은 칠월 한여름이니, 일하는 사람들 몸보신하는 의미가 크다. 들일을 시작하는 봄부터 그 무렵까지 질꾼들은 논이며 밭에서 허리 한번 제대로 펼 새 없이 일해 왔다. 질상은 그렇게 쉬지 않고 일해 온 사람들을 생각하며 아까운 것 없이 내놓아 지친 몸을 다스린 상차림이다.
♣ 일하는 사람들의 관례(冠禮), 판례
“여보게들, 이 아이는 내가 그동안 한 식구처럼 가르치고 키워온 아일세. 내 나이가 이러하니 오늘내일 장담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네. 이제부터 이 아이를 어른 일꾼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질 먹는 날이었다.
창녕 조씨 명숙공 종가의 노종손께서 키가 부쩍 자란 전매총각 손을 잡고 질꾼들을 향해, 선군을 향해 차분하게 말씀을 이었다. 말씀에 이어 전매 총각은 대나무 꼬치에 세 개씩 꽂은 떡꼬치를 질꾼들에게 하나씩 전하고, 술도 한 잔씩 따라 올린다.
질 먹는 날은 7월 초입, 마저 모를 심고 단오를 치르고 애벌 김, 세 벌 김까지 매고 논의 일이 좀 잦아들 무렵이었다. 강릉 인근에서 질은 30명 단위 일꾼집단이다. 그 대장은 선군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질 먹는 날은 칠월 한여름이니, 일하는 사람들 몸보신하는 의미가 크다.
들일을 시작하는 봄부터 그 무렵까지 질꾼들은 논이며 밭에서 허리 한번 제대로 펼 새 없이 일해 왔다. 질상은 그렇게 쉬지 않고 일해 온 사람들을 생각하며 아까운 것 없이 내놓아 지친 몸을 다스린 상차림이다. ‘질 먹는 날’ 종가에서도 정성 들여 상을 차린다.
질 먹는 날, 판례(判禮)를 겸하기도 했다. 농경사회에서는 개인의 노동력을 한 사람의 것으로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판례의 판가름을 통해 품앗이에서건 품삯에서건 온전하게 장정으로 대접받게 된다.
노종손의 말씀이 끝나자, 선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질의 일꾼들과 전매 총각을 향해 말했다. “그동안 이 아이 일하는 품새를 지켜보아왔는데, 가래질도 제법이고, 이제 한사람 일꾼 몫으로 충분하다.” 이 질 먹는 날 먹는 상이 질상이고, 판례 마당에서 떡을 돌려 먹는 상이 판례떡상이다
.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고 함께 즐기는 날이다. 1960년대 이 댁에 시집온 최영간 종부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질 먹는 풍경, 판례 풍경이다. 종부는 그날 한 아이가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종가 가 족과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격려하고 축하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고 한다.
♣ 농부들의 지친 몸을 다스리는 질상차림
질 먹는 날, 주인도 일꾼 위해 차릴 수 있는 것 없는 것 다 챙겨 상을 차렸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영계길경탕, 영계삼계채이다. 적당히 자란 영계에 도라지, 인삼, 대추를 넣고 끓여 수제비를 띄운 영계길경탕과 씨종지 떡을 함께 든든하게 먹으면 한여름 더할 나위 없는 보양식이 된다.
판례떡상은, 판례떡과 송죽두견주를 곁들이고, 질상은 씨종지떡, 영계길경탕, 영계삼계채, 두부지짐, 무선, 옥수수범벅, 호박도래적, 포식해, 묵김치에 가양주를 곁들여 차린다.
▪ 영계길경탕
길경은 도라지다. 봄에 깐 병아리가 초여름이면 영계가 된다. 알맞게 자란 영계를 잡고, 한창 맛이 오른 도라지를 인삼, 대추와 함께 넣어 끓인다. 이어 감자와 호박을 넣고, 그 국물에 수제비를 띄운다. 국수를 마는 육수로 쓰기도 한다.
▪ 영계삼계채
영계길경탕에서 국물을 내고 건진 닭의 살을 손으로 찢어 놓는다. 오이와 인삼을 채로 만들어 넣고 참기름, 붉은고추, 풋고추, 깨를 넣고 무친다. 통 인삼 두 개로 장식을 마무리한다.
▪ 무선
고추장에 박아 두었던 무장아찌를 채 썰어 참기름, 통깨, 갖은 양념으로 무친다. 고춧잎은 데쳐서 같은 양념으로 무친다. 무를 쪄서 칼집을 내어 소금, 참기름, 통깨로 밑간한다. 칼집 낸 무 안에 채 썬 무장아찌와 고춧잎을 번갈아 넣는다. 먹을 때는 함께 채 썰어 섞어서 무쳐 먹는다.
▪ 옥수수범벅
옥수수 알을 디딜방아에 살짝 찧는다. 옥수수는 껍질을 벗기고 키에 넣고 까불러 놓는다(능군다). 능군 옥수수에 강낭콩과 팥을 넣고 삶는다. 삶으면서 간은 소금으로 하고, 완성되기 전에 꿀도 넣는다.
▪ 포식해
제사상에 올렸던 대구포, 명태포 등을 모아서 엿기름과 양념에 재운다. 찰밥과 고춧가루를 섞어서 발효시켜 상에 올렸다. 고춧가루 넣지 않고 만들면 소식해라고 한다.
▪ 씨종지떡
모내기까지 마치고, 곳간채 큰 독에 남겨두었던 볍씨를 꺼내, 쌀을 찧고 빻아 만든 떡이다. 햇쑥이며 호박오가리, 싸라기 밤이며 대추, 곶감 말릴 때 부스러기로 남은 쪼가리 감을 넣고 떡을 찐다. 떡가루 함지에 꽃이 피듯 색이 핀다.
♣ 또 하나의 성인식, 판례와 판례떡
강릉지역에는 관례, 계례와 더불어 판례가 있었다. 남자는 관례로 여자는 계례로 성인이 되었음을 알린다면, 판례는 성인이 되어 한 사람 일꾼 몫을 충분히 할 수 있음을 알리는 일꾼들의 성인식이다.
강릉에서는 질 먹는 날을 맞아, 판례를 맞는 이가 있는 집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창녕 조씨 명숙공 종가 종부의 기억 속에 판례가 또렷하게 남아있다.
▪ 판례떡
밤, 팥, 강낭콩을 계절에 맞게 소로 넣어 빚는다. 쑥, 치자, 해당화로 삼색을 내었다. 보통의 송편보다 훨씬 크다. 큼직하게 만든 것은 한 끼 식사에 맞춤하게 하기 위해서다.
한사람에 판례떡 세 개를 한 꼬치에 꿰어서 나눠준다. 대신 선군이나 자리에 함께한 종가의 종손 어르신께는 꿰지 않고 그릇에 얌전하게 담고 술을 곁들여 드렸다. 세 가지 색은 즐겁다, 축하한다는 뜻이다.
♣ 여재당,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최영간 종부
서지마을의 봄은 소쩍새와 함께 시작한다. 두견새, 접동새와 같은 이름이다. ‘솥쩍다, 솥이 적다’ 목청을 높여, 궁핍한 마을의 살림살이를 전하는 소리로부터다. 종가의 살림살이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살림살이까지 한눈으로 살피는 것이 종가의 일이었다.
종택 한편에 단아한 글씨가 있다. 여재당, ‘여재(如在)’라는 글자는 그가 시할아버지께 받은 말씀이다. 어머니의 마음과 같이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마음을 담으라 한, 글씨다. 그가 종부로 살아낸 40여 년의 세월이 바로 그 마음으로부터다.
오늘 밥상에는 무슨 나물을 올릴까. 최영간 종부는 새로 돋는 나물을 만나러 매일 새벽 서지의 들녘으로 나간다. 특히 이른 봄눈이 녹자 바로 돋아난 새싹들 앞에서는 깊은 감동을 한다.
이밥나물, 조밥나물, 콩나물, 잣나물, 조개나물, 숟가락나물……, 모두 어머니가 세월 내내 우리를 키워주던 음식이름이다. 그 바탕에는 흙의 힘이 있다. 시와 때를 맞춰 그 씨앗을 키워 보내주어, 우리를 키워내는 힘, 종부는 그 흙의 모습에서 모성의 강한 힘을 발견한다고 한다.
흙의 가슴을 닮은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한다. 유학자로 인근의 존경과 신망을 두루 받으시던 시할아버지의 풍모, 아직 그에게 어제 일 같다.
그 시할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씀, 여재당의 뜻을 새기며 어머니의 마음같이 늘 한결같은 정성으로 종가의 음식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바로 질상과 못밥 같은 종가의 음식을 차려내는 ‘서지초가뜰’에서다.
♣ 서지마을 든든한 명숙공 종가
창녕 조씨 명숙공 종가의 종택은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 일명 서지마을에, 1700년 후기에 지어진 가옥이다. 알뜰한 쥐가 곡식을 모아들이는 형세. 일컬어 서지(鼠池)골이다.
과거급제를 알리는 솟대를 세웠던 솟대 거리를 돌아들면 안채, 곶간채, 사랑채, 대문간이 있고 이어져 입구(口) 자를 이룬 종택을 만난다. 안채 옆에는 사당이 조촐하지만 의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설 명절을 맞으면 사당 마당에 200여 명의 세배객이 찾아온다.
일문(一門)이 한자리에 모여 세배를 하는 도배식을 한다. 그 도배객을 맞는 일이 이 댁 종부의 큰 일 가운데 하나다. 도배행사가 그렇게 공동체의 동질성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면, 질터에서 질상을 나누고, 판례떡을 나누는 시간 또한 휴식과 충전을 전제하며 아름다운 이웃의 정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명숙공 종가는 서지마을 사람들에게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선군에게 전매 총각을 부탁하던 할아버지의 근엄하신 목소리는 곧 그들의 넓은 품속이었다. “나를 위한 의식주는 최소한으로 하라. 그러나 책과 사람은 후하게 품어라.”
서지 조진사댁으로 불리는 종택에는 자가용 자동차가 없다. 마흔 넘은 아들(차종손)이 중고등학교 시절 통학용으로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조옥현 현 종손의 유일한 자가용이다.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종손은 온몸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