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 종가는 가문을 찾는 과객에 소홀하지 않고 거두어 편히 쉬게 하였다. 그 상차림에 빠지지 않았던 술, 솔향 가득한 술 내음이 번진다. 한양 천 리 과거 길에 오른 청년 과거꾼의 걸음이, 함양 일두 가문의 솔향 번지는 술상에서 한숨 쉬어가는 것이었다.
♣ 세월을 따라 더욱 깊어지는 솔향
일두 정여창 종가에는 솔잎과 순을 재료로 만든 가양주가 전해온다. 이를 송순주, 송주, 솔잎주라 불렀다. 선비들의 기개와 절개를 상징하던 소나무는 소나무의 솔잎, 속껍질, 솔방울, 송진, 뿌리부터 마디에 이르기까지 유용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는 약재 덩어리여서 각각을 술로 빚어 즐겨 마셨다고 한다.
솔송주는 종중이나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빚던 술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솔송주를 담그는 횟수가 줄었다. 일두 종가는 가문을 찾는 과객에 소홀하지 않고 거두어 편히 쉬게 하였다.
그 상차림에 빠지지 않았던 술, 솔향 가득한 술 내음이 번진다. 한양 천 리 과거 길에 오른 청년 과거꾼의 걸음이, 함양 일두 가문의 솔향 번지는 술상에서 한숨 쉬어가는 것이었다.
일두 종가에서는 칠첩반상이 남달라, 숙채, 김치, 김자반, 낙지무침, 육회, 수란, 조기가 올라간다. 이는 일두 정여창 선생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 가운데, 귀한 것만 올린 것이다.
♣ 버섯향으로 깊어지는 솔송주 주안상차림
소나무 순을 넣어 만드는 솔송주는 산에서 나는 버섯류가 안주로 잘 어울린다. 개평마을에서는 석이버섯무침을 주로 먹었다. 바위에 붙은 귀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석이는 담백한 맛이 솔송주의 깔끔한 뒷맛을 더욱 짙게 한다.
▪ 솔송주(솔松酒)
솔송주는 알코올 도수 13도의 약주와 40도의 증류주 두 가지가 있다. 약주는 토종찹쌀에 곡자, 솔잎, 송순을 넣어 만들며, 지리산 자락의 지하암반수로 빚는다. 증류주는 찹쌀 대신 멥쌀을 쓰며 20여 일 발효 후 증류하여 숙성시킨다. 솔송주는 은은한 솔향이 난다.
▪ 석이버섯무침
동의보감에서는 석이를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하고 얼굴 빛이 좋아지게 하며 배고프지 않게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석이버섯무침은 깨끗이 손질한 말린 석이버섯을 끓는 물에 데쳐서 사용한다. 데친 석이버섯을 찬물에 헹궈 소쿠리에 건진 후 물기를 꼭 짠다. 간장, 참기름으로 무친 뒤, 실고추를 고명으로 얹는다.
▪ 도라지·무·연근정과
정과는 채소나 과일을 설탕이나 꿀에 재거나 조린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다. 도라지, 무, 연근은 깨끗하게 손질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준비한다.
재료를 각각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데쳐서, 찬물에 담갔다가 물기를 뺀다. 냄비에 설탕, 물엿, 물, 준비한 재료를 넣어 조린다. 치자물과 오미자로 도라지와 연근에 각각 색을 내고 꿀을 넣어 윤기와 맛을 더한다.
▪ 배추전
한 잎씩 뜯어서 깨끗이 씻은 배춧잎을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살짝 데친다. 데친 배추에 밀가루 반죽을 묻혀,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노릇하게 지져낸다.
▪ 무전
납작하게 썬 무를 김이 오른 찜통에 소금을 뿌려 살짝 찐다. 찐 무에 밀가루를 묻힌 후 반죽을 입혀, 식용유를 두르고 노릇하게 굽는다. 무를 찌지 않고 채 썰어 밀가루 반죽에 섞은 다음 지지기도 한다.
♣ 일두 종가 가양주 맥을 이어 세계까지 박흥선 전통식품명인
솔송주는 원래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빚은 가양주로, 일두 집안에서는 송순주라고 불렸던 술이다. 처음 명가원을 운영하려고 했을 땐 가문의 반대도 컸다. 보수적인 집안이라 가양주를 상품화한다는 데에 반감이 일었던 탓이다.
정천상 명가원 대표는 (사)일두정여창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일두 가문의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가양주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고 있다. 그 일의 맨 앞에 있는 이가 솔송주 명인 박흥선이다.
그는 2005년 전통식품명인 제27호에 지정된 솔송주 명인이다. 물론 시어머니, 이효의 여사에게 솔송주 기술을 전수받으면서부터다. 이효의 여사는 술을 조금도 마시지 못하지 만, 술 만드는 것을 좋아해 85세까지 직접 솔송주를 담갔다고 한다.
가문의 내림술에 그만큼 애정이 각별했는데 그 맥을 잇게 하고자 막내며느리 박흥선명인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명가원은 솔송주와 함께 함양지역에서 복분자, 머루로 담근 술을 가지고 해외 수출에 전력하고 있다
♣ 개평마을과 박석으로 포장한 일두 정여창 고택
함양은 안동과 더불어 양반의 고장으로 불린다. 개평마을은 지형이 ‘개(介)’자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증조부인 정지의가 처음 이곳에 자리 잡은 후 하동정씨 집성마을이 되었다.
500여 년이 넘은 개평마을에는 오래된 소나무 군락과 한옥 60여 채가 모여있다. 일두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부모에 대한 효행이 컸던 분이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공부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갔다.
성리학의 대가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5현으로 불린다. 성종21년(1490년) 과거에 급제해 동궁이던 연산군을 보필했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총애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4년(1498년) 무오사화 때 사초에 기록을 제대로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되어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 되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고,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용학주소』, 『주객문답설』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태워 없앴다고 한다. 문집으로 『일두유집』이 있다. 일두 고택으로 향하는 길은 박석(薄石)으로 포장되어 있다.
집으로 드나드는 말과 우마차에 길이 파일까, 아예 포장해놓은 것이다. 개평마을에는 대하드라마 <토지>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던 일두 고택과 남계서원 등 전통 체험거리가 마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