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첨당의 무첨(無添)은 집안의 가훈처럼 새기는 말씀이다. ‘조상들께 욕됨이 없도록 하자’는 의미다. 그러니 더더욱 행동거지가 조심스럽다. 예전에는 회재 종손과 한자리에 있는 것도 영광으로 여길 만치, 회재 할아버님의 명성이 높았다.
♣ 조상께 욕됨 없이, 무첨당無添堂
무첨당(無添堂) 뒤뜰 목화가 흰 목화솜을 틔우며 속살을 비추고 있다. 여주 이씨 회재 이언적 선생 종가, 신순임 종부의 솜씨다. 혼수 함에 넣어 쓸모가 컸던 목화솜이다. 혼례 치르는 집이면 꼭 찾아와 가져가고는 했는데, 요즘은 그 쓸모가 다해 가는지 발길이 줄었다.
그래도 목화솜이 트이는 가을 오후면, 그처럼 마음도 희고 보숭보숭하게 되는 것만 같아, 무첨당을 찾는 사람들의 긴한 눈요기가 되고 있다. 무첨당의 무첨(無添)은 집안의 가훈처럼 새기는 말씀이다. ‘조상들께 욕됨이 없도록 하자’는 의미다.
그러니 더더욱 행동거지가 조심스럽다. 예전에는 회재 종손과 한자리에 있는 것도 영광으로 여길 만치, 회재 할아버님의 명성이 높았다.
지금도 양동초등학교 반 이름이 ‘무첨당’, ‘향단’ 같은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 아이들도 집에서 특별히 교육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회재 종가를 알게 되고, 자긍심을 느끼는 것 같다.
종가는 예나 지금이나 손님들로 분주하다.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특별한’ 손님들이 오히려 많아졌다. 친척분들은 “쟈들 고생하는데 우리까지 가면 우야노” 하며 오히려 잘 오시지 않는단다.
♣ 입맛 돋우는 식전 주안상
주물상은 귀한 손님께 식사와 별도로 먼저 차려 내어 놓는 주안상이다. 무첨당 주물상엔 가양주(국화청주), 집장, 육포, 북어보푸라기, 육회, 어회, 초고추장, 감주, 쌀엿, 약과, 유과, 다식, 호두곶감말이, 떡, 무떡, 계절 과일 등이 놓인다. 옛날에는 양동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와 신선한 횟감을 구하기 수월했다.
▪ 국화주
손 없는 날을 잡아 국화청주를 빚는다. 겨울에는 국화꽃을 넣고, 여름에는 솔잎을 넣어 술을 빚는다. 서리가 오기 전에 국화를 거둬 갈무리해뒀다가 한 해 동안 술을 담갔다. 꽃은 따로 말려서 제사에 쓰는 전(지진 떡)이나 국화차로 쓰고, 줄기는 말려뒀다가 술을 담근다.
찹쌀로 만든 고두밥에 잘게 빻은 누룩, 국화 달인 물을 넣고 버무려서 항아리에 넣어 술을 빚는다. 3일 정도 지나면 술이 올라오는 소리가 난다. 여름 술은 일주일, 겨울 술은 보름 정도 걸린다. 다 되면 술을 떠서 서늘한 곳에서 숙성시킨다.
▪ 집장
콩가루, 통밀가루, 보릿가루를 작은 덩어리로 만들어 ‘따붓대’라고 불리는 풀을 깔고 말린다. 집장이 필요할 때마다 말린 덩어리를 가루 내서, 찹쌀풀과 물엿을 넣고 소금간을 해서 버무린다.
거기에 무, 가지, 부추, 박, 다시마, 버섯, 열무 등 여덟 가지 속 재료를 넣고 섞는다. 옛날에는 두엄 열기에 삭혔는데, 지금은 전기밥통에 넣어서 36시간 정도 발효시킨다. 발효가 끝나면 큰 솥에 넣고 끓여서, 한 번 먹을 만큼씩 보관한다.
▪ 육포
북어대가리, 생강, 마늘 등을 넣고 달인 물에 배즙, 양파즙, 간장으로 맛과 색을 내 양념을 만든다. 쇠고기(홍두깨살)는 설탕과 소주를 넣은 물에 담가 핏물을 뺀 뒤 넓게 포 뜬다. 쇠고기 포를 양념에 적셔서 잘 펴서 볕에 말린다. 하루 정도 말려서 꼬들꼬들해지면 거둬들여서 잘 펴서 다시 말린다. 추운 날씨에 얼었다 말렸다 해야 제맛이 난다.
▪ 모듬한과
쌀엿, 약과, 유과, 다식, 호두곶감말이 등을 한 그릇에 담는다. 다식은 준비된 가루에 조청이나 꿀을 섞어서 다식틀에 꼭꼭 눌러 담아서 모양을 낸다. 흰색은 쌀가루로, 노란색은 송홧가루로, 검은색은 검은깨로, 황토색은 청국장가루로, 짙은 갈색은 검은 청국장가루로 만든다.
약과는 밀가루에 참기름을 고루 섞어 체에 내려서 꿀, 생강즙, 청주를 넣어 반죽해서 모양을 낸다. 기름에 튀겨서 계핏가루와 물엿을 넣은 집청액에 담갔다 꺼낸다. 고명으로 잣가루를 솔솔 뿌리기도 한다.
♣ 언제까지나 무첨당 새댁 신순임 종부
종택 안팎을 두루 가꾸며 매만지는 신순임(49세) 종부는 20년 전에 청송 중들 평산 신씨 집안에서 시집왔다. 친정 또한 종가여서 중매결혼이라도 거부감은 없었다. 그래도 가끔 ‘서울로 살림 내준다 하셨는데 언제 내주는고’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학교 다니고 일하느라 음식솜씨 익힐 새 없이 시집왔다. 시어머니 하시는 걸 보고 음식이며 대소사 챙기는 법을 배웠다. 10여 년 전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집안 살림을 물려받게 되면서, 이제는 종택이 종부의 살림이 되었다.
아이들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살림을 내서 도회지로 나갔다가 오도록 약조가 되었던 것인데, 종부의 운명은 이렇게 난데없다.
예전 종부들은 ‘봉제사 접빈객’ 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찾아오는 기관이나 민간단체 손님 맞을 준비로 바쁘고, 종부로서 대외적인 일에도 참여해야 한다. 남편인 이지락 종손은 한국국학진흥원 객원연구원으로 일하며 양동마을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 조선 도학의 큰 봉우리, 회재 이언적 선생
‘하늘을 두려워하오(畏天), 마음을 잘 길러내오(養心),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오(敬心), 마음의 허물을 늘 고치오(改過), 의지를 돈독히 하오(篤志).’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이 27세에 지은 『오잠(五箴)』이라는 글이다.
그는 하늘[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강조한, 조선조 도학의 우람한 봉우리였다. 회재 선생은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그의 사상은,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회재 이언적 선생과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은 동시대를 지낸 동반자였다. 그때부터 인연으로 지금도 양가 인연이 두텁다.
무첨당은 앞면 다섯 칸·옆면 두 칸 규모로 건물을 세 부분으로 나눠,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고 좌우 한 칸씩은 온돌방이다.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손님접대와 휴식, 책 읽기 같은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별당건축으로 맞춤하게 지은 건축물로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