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사람들은 상당한 수준에 들어도 ‘좋다’, ‘최고다’ 이런 표현을 잘 안하고 그저 ‘괜찮다’라고 해요. 자화자찬인가요?” 홍조 띤 얼굴로 웃으며 종손이 말씀하신다
♣ 매운 솜씨 엿보이는 정갈한 주안상
술안주로는 견과류만한 것이 없다. 견과류와 함께 술을 마시면 술기운이 더디게 올라 쉬 취하지 않는다고 한다. 준비된 재료에 따라 구절판 대신 오절판이 되기도 하지만 곶감말이는 빠뜨리지 않고 준비한다.
“시집와 처음 어머니께서 주안상을 보라고 하셨는데, 맨 곶감을 상에 올렸다가 꾸중을 들었어요. 그때는 왜 그런 줄도 모르고 야단을 들었는데, 그 후로 어머니 하시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배우게 되었죠.”
음식솜씨 높기로 이름난 성주 한개마을에서 시집와 손끝이 유난히 매웠던 시어머니의 음식솜씨에 『수운잡방』에 담긴 친정 음식솜씨가 더해져 정재 종가의 주안상을 채운다.
♣ 갖가지 색으로 조화로운 주안상차림
생율을 중심으로 잣과 호두를 박은 곶감말이, 대추잣말이, 송화다식, 육포, 은행, 호두, 잣을 가지런히 담은 마른구절판. 색색 고명이 가지런히 담긴 청포묵이 조화롭다.
친정 솜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전계아, 재래간장으로 맛을 낸 육회, 꽃처럼 화사한 송아지피편, 문어, 전복, 삼색 전유어, 삼색 보푸름(보푸라기). 안동 양반가 종부의 매운 손끝이 엿보이는 정갈한 주안상이다.
▪ 전계아
전계아는 『수운잡방』에 소개된 음식으로 종부의 친정에서 자주 해먹던 음식이다. 먹기 좋은 크기로 손질한 닭은 피를 깨끗이 씻어 낸 후 솥에 참기름을 두르고 볶다가, 청주, 식초, 물, 재래간장을 넣어 조린다. 다 조려지면 다진 파, 후추, 형개, 천초가루를 쳐서 먹는다.
▪ 탕평채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긴 녹두를 갈아 망에 걸러놓는다. 가라앉은 전분으로 청포묵을 쑨다. 쇠고기, 당근, 새송이버섯, 표고버섯, 석이버섯은 손질하여 약 4∼5cm로 채 썰고, 미나리도 같은 길이로 썰어서 소금 간을 조금 해 참기름에 볶아낸다.
먹기 좋은 크기로 채 썬 청포묵을 접시에 담고, 황백지단과 준비한 부재료를 보기 좋게 돌려담는다. 양념간장으로 간을 하여 무쳐 먹는다. 잣가루 뿌려서 먹기도 한다.
▪ 육회
쇠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설탕, 참기름, 소금, 다진 마늘, 깨소금으로 무친다. 배를 깎아 채 썰어 밑에 깔고, 위에 쇠고기를 올린 다음 잣가루를 뿌려낸다.
▪ 삼색 보푸름(보푸라기)
북어는 살만 뜯어서 물에 살짝 적셔 방망이로 두드려 부드럽게 한 다음, 숟가락으로 긁어낸다. 마른오징어는 물에 불려 김이 오른 찜통에 살짝 쪄낸 다음, 다시 살짝 말려서 방망이로 두드려 가늘게 찢는다. 육포는 방망이로 두드려 가늘게 찢어놓는다. 준비된 각각의 재료에 소금, 참기름, 설탕을 넣어 무쳐낸다.
▪ 마른 구절판
곶감호두말이는 곶감 씨를 발라내고 호두를 박아 돌돌 말아서 묶어뒀다가 한입크기로 썬다. 곶감잣말이는 곶감씨를 발라내고 국화꽃처럼 오린 다음 꽃잎마다 잣을 박는다. 송화다식을 만드는 송홧가루는 봄에 소나무에서 채취해서 깨끗한 물에 띄워서 송홧가루만 거른 후 한지에 말렸다가 쓴다. 송홧가루를 꿀에 개서 다식틀로 모양을 낸다. 구절판에 준비한 생율, 볶은 은행, 곶감호두말이, 곶감잣말이, 대추잣말이, 송화다식, 호두, 잣, 육포를 가지런히 담는다.
♣ 가을 국화처럼 은은한 맛, 송화주
정재 종가의 가양주로 200년 이상 내려온 안동송화주는 1993년 경상북도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종부는 1999년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송화주는 원래 시월 국화꽃이 필 때 담아서 겨우내 제주로 쓰고 손님상에 냈다.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한여름에는 술을 담기 어려웠다.
지금은 가을에 국화꽃잎을 갈무리해뒀다가 수시로 술을 담근다. 안마당에 키운 국화꽃과 뒷산 솔잎을 재료로 쓴다. 술 담그는 게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어른 돌아가시면 그만해야지 했는데, 이제는 술을 담그시던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만큼 세월이 흘렀다.
▪ 송화주 담그기
멥쌀과 찹쌀에 솔잎을 켜켜이 넣고 찐 다음 누룩과 끓여서 식힌 물을 넣고 섞어서 25도씨에서 3일간 발효시켜 밑술을 만든다. 멥쌀과 찹쌀을 반씩 섞어 찐 다음, 술독에 찐쌀과 만들어둔 밑술을 섞고, 국화를 넣어 한달 정도 발효시킨다. 가을국화는 말려서 쓴다. 국화 대신 인동꽃을 사용하기도 한다.
♣ 종가에서 종가로, 종부의 기품 김영한 종부
임하댐이 생기기 전, 종택은 수몰된 한들마을에 있었다. 종손은 일찍 할아버지,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나이에 종손이 되었다. 23살에 정재 종가의 종부로 큰대문을 들어섰다. 그 뒤로 40년이 흘렀다. 종부의 음식솜씨는 친정으로부터 시작해 시댁으로 이어진다.
봉화에서 시집온 친정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새벽이면 타락죽을 끓여 조반 전에 사랑에 들였다. 성주 한개마을 한주 종가가 친정이신 시어머니도 폐백음식까지 두루 솜씨가 좋으셨는데, 혼사집에 다녀오시면 폐백음식을 챙겼다가 종부에게 건네주셨다.
며느리가 맛은 물론이고 모양새 고운 음식을 만들기 바라셨던 것이다. 가양주로 송화주를 담그시던 시어머니께 술 담그는 법을 전수받았고, 친정에 전하던 고조리서 『수운잡방』을 언니와 함께 재현했다.
모르는 옛날식 개량 단위가 많아 재현이 어려웠지만, 책을 들여다보니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들도 많았다. 종부의 친정은 안동 광산 김씨 설월당 종가다. 아버지는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알았다” 하시며 회초리 한 번 드신 적이 없지만, 밥상머리 교육만은 엄하셨다.
‘밥은 한 알도 남기지 마라’, ‘밥은 팔십 번, 백 번 꼭꼭 씹어서 삼켜라’, ‘수저를 내려놓을 때는 천정이 듣지 않게 살짝 내려놓아라’, 어린 시절 수저를 내려놓을 때마다 천정을 바라봤던 기억이 선명하다.
“니는 다른 사람과 다르니라.” 어려서부터 들었던 친정아버지의 말씀 한마디가 가슴에 새겨져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조심스럽다. 종가에서 종가로 이어온 마음가짐이 오늘날 종부의 기품을 만들어준 밑거름이다.
♣ 정재 류치명 선생과 정재 고택
정재(定齋) 류치명 선생은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대산 이상정 등의 학맥을 계승, 19세기 영남 이학(理學)을 발전시키고 꽃피우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정재의 가르침을 받은 직계후손과 많은 제자들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 강점기 초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영남유림의 상소운동과 위정척사운동, 의병운동, 독립운동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정재 선생은 1963년 9월 25일 종손이 증조부 3년 상을 마치고 정식 종손이 되는 의식인 길사(吉祀)에서 유림과 종친 600여 명이 모여 불천위로 결정했다. 정재 고택은 퇴계학파의 거봉인 정재 류치명 선생의 종택으로, 그의 고조부인 류관현이 조선 영조11년에 건립하였다.
1987년에 임하댐 건설로 조상의 묘소와 가까운 현재 위치로 옮겼다. 미처 옮기지 못한 강당, 방앗간, 서고 등은 수몰과 함께 사라졌다. 고택은 대문채, 정침, 행랑채, 사당으로 이루어졌으며 솟을 대문이 있다. 내부에는 정재 선생이 편찬한 명당실소설과 이재 권연하 선생의 경서정재명당실후의 현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