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진국수는 분초를 다투는 우리 시대를 거꾸로 웅변한다. 먼 길 찾아온 손님에게 급히 상을 올릴 수 있으면서도, 슬로푸드처럼 맛과 영양, 뛰어난 색감을 충분히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기별없이 찾아드는 길손에 맞춤한 건진국수
건진국수는 안동 지방에서 널리 먹는 음식이다. 특히 첩첩산중 굽어 도는 길을 따라 기별 없이 지촌 종가를 찾은 손님들에게 내놓기에 맞춤한 음식이다. 지촌 종가 이순희 종부는 “맛과 재료는 물론, 솜씨와 집안 내림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하다” 귀띔한다.
건진국수는 분초를 다투는 우리 시대를 거꾸로 웅변한다. 패스트푸드처럼 갖은 재료를 모아, 먼 길 찾아온 손님에게 급히 상을 올릴 수 있으면서도, 슬로푸드처럼 맛과 영양, 뛰어난 색감을 충분히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슬로푸드처럼 알찬 건진국수 상차림
건진국수 상차림은 건진국수뿐 아니라, 육회, 더덕구이, 민물생선구이, 육말, 명태보푸름, 오이선, 호박돈적 등 풍부한 반찬들도 함께 나와 입맛을 더욱 돋우게 한다.
▪ 건진국수
김방걸 종가의 건진국수는 멸칫국물, 참깨국물, 은어국물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면은 밀가루와 콩가루를 4대1 비율로 섞어 반죽한 후 홍두깨로 민다. 종잇장처럼 얇게 밀고 가늘게 썰어야 제맛이 난다.
썰어둔 국수는 뜨거운 물에 삶아 찬물에 헹궈 그릇에 담는다. 미리 준비한 국물을 넉넉하게 부어 석이버섯, 쇠고기볶음, 호박볶음, 황백지단을 고명으로 얹는다. 양념간장을 곁들인다. 여름철에 즐겨 먹는 음식이지만 봄, 가을에 국물을 따뜻하게 해 먹기도 한다.
▪ 육회
기름기 없는 소의 우둔살을 얇게 저민 다음 결을 끊어서 가늘게 채 썬다. 배는 껍질을 벗겨 가늘게 채 썰고 마늘은 껍질을 까서 얄팍하게 저민다. 간장에 다진 마늘, 참기름, 설탕을 섞어서 양념장을 만들고, 채 썬 쇠고기를 고루 무친다. 채 썬 배와 무친 고기를 보기 좋게 담고, 저민 마늘이나 잣가루를 고기 위에 뿌린다.
▪ 민물생선구이
경북지역에서 주로 먹던 음식이다. 내장을 꺼내고 깨끗하게 손질한 민물고기를 말려서, 은은한 불에 훈제한 다음 기름에 튀겨 양념장을 발라 구운 것이다. 꺽지, 피라미, 빙어 등 작은 생선을 이용한다. 민물고기튀김구이라고도 한다.
▪ 육말
쇠고기에 양념과 다진 잣을 넣어 볶은 것이다.
▪ 오이선
오이 사이에 칼집을 넣고,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소를 넣고 찐 전통음식으로, 주로 궁중에서 일상식 반찬으로 사용했다. 또한 잔칫상이나 손님을 대접하는 상에도 사용되었다. 향기와 색깔이 좋아 여름에 어울리는 음식이다. 쇠고기, 황백지단, 잣, 실고추를 소로 쓰고, 새콤달콤한 단촛물을 만들어 끼얹는다
♣ 우리 시대 종가를 지키는 종부의 풍모 이순희 종부
이순희 종부는 안동 출신, 도산면 의촌리 의인마을이 친정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로, 아버지 직장 때문에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유년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 6.25전쟁으로 안동으로 피난 와서 생활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촌 김방걸의 13대 종손인 김원길 시인과 결혼한다.
종갓집 음식은 대부분 시어머니에게 배웠는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신혼 초기에는 안동 시내에서 살았다. 그러다 남편의 바람대로 ‘예술촌’ 이름을 붙여, 마을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금의 종택은 1986년 임하댐을 세우면서 수몰될 위기에 놓인 것을, 이주보상비를 고스란히 들여 지금의 자리, 지례예술촌으로 옮겨온 것이다. 3년이 걸린 대공사였다. 이순희 종부는 요즘 사람들이 집을 지키지 않는다면서, “집에 사람이 있어야 온기가 퍼지고 집다운 집이 된다”고 한다.
우리 시대 종가를 지키는 사람의 풍모가 스미어 있다. 집안에 어른이 자리하고, 후대가 그 체취를 통해 사람의 도리를 자연스레 배우는 것, ‘공정’과‘ 정의’를 다시 깊이 고민하는 시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다.
♣ 지촌 김방걸 종택과 지례예술촌
지촌 김방걸(1623~1695)은 자는 사흥(士興)으로 조선 후기 문신이다. 1660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고 숙종 때 대사성을 지냈다. 저서로 『지촌문집』이 있다.
지촌은 안동 내앞마을의 청계 김진의 현손(玄孫)으로 약봉 김극일의 증손이자, 표은 김시온의 넷째 아들이다. 38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40세에 지례로 분가했다.
지례는 1975년에야 전기가 들어오고 버스가 다녔던 오지다. 지촌은 청렴하고 은거를 즐기던 성품으로 깊숙한 지례에 터를 잡은 것이다. 지촌 김방걸과 그의 자손들은 지례에서 340여 년 동안 동족 마을을 이루며 주경야독하며 살았다.
지례마을은 전형적인 사림(士林)마을이었다. 1663년 건립된 종택은 종택, 사당, 방앗간, 별묘, 곳간, 문간채 등으로 되어 조선시대 전형적인 종가 양식을 보여준다. 1980년대 초 임하댐 건설 계획이 발표되자, 문중 소유의 종택과 제청, 서당 등을 경북문화재자료 제44호로 지정받아 마을 뒷산 중턱으로 옮겼다.
터를 옮긴 종택은 한국 최초의 예술창작마을인 ‘지례예술촌’으로 변모했다. 지례예술촌은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며 주거환경체험, 단체공연행사 등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