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 기와에 곱게 핀 이끼 위 간간간 눈꽃이 내려 피었다. 음력 11월 15일, 해남 윤씨 입향조 어초은 공의 불천위 제사상이 눈꽃 아래 오색이 환하도록 차려졌다
♣ 고명으로 화사한 제례음식
아침 일찍 사당문이 활짝 열렸다. 백발이 희끗한 문중 사내들이 안채부터 음식을 나르고 제사상을 차리느라 분주하다. 몸이 예전만 못하다며 허리를 툭툭 치면서도, 신발을 벗고 사당에 오르는 몸가짐이 조심스럽다. 안채 밖에는 산신을 모시는 산신제 상도 따로 진설되었다.
녹우당을 감싸고 있는 덕음산 산신들께 집안의 안녕을 비는 것이다. 간간이 날리던 눈발이 빗방울로 바뀌어도 제관들은 버선발로 제청 앞에 선다. 음력 11월 15일 입향조 어초은 윤효정 공의 불천위 제사다.
나라에서 술빚기가 금지되었을 때도 국불천위 제사에 쓰일 제주만은 특별히 허락되었다. 한 가마니씩 누룩을 빚고 두 되짜리 틀로 누룩덩어리를 만들어 대청 처마에 매달면, 그대로 장관이었다.
예전만큼 떡이나 술을 준비하지는 않지만, 제수 장만에 며칠 동안 안채 부엌이 들썩였다. 제기에 음식을 쌓는 것만도 하루가 꼬박 걸린다. “제물 괼 때는 입도 벙긋하면 안 돼” 하시는 종가의 아낙네들. 손가락 마디는 굵어졌지만 음식을 쌓는 손길만큼은 새각시처럼 곱다.
사당에서 제사가 모셔지는 동안 종가의 며느리들에게 짧은 휴식이 돌아온다. 제사가 끝나면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은 집안사람들에게, 산신제 음식은 마을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 어초은 윤효정 공 불천위 제사상차림
고명이 화려한 어만두, 육만두는 궁중에서 하사품으로 내렸던 것이다.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 민어, 숭어 같은 큰 생선이 통째로 상 위에 오른다.
쇠고기를 꼬챙이에 꿰 숯불에 구운 산적, 고명이 꽃같이 고운 족편, 노란 지단 위에 천엽을 싸 만든 해삼. 채소로 만든 느름이, 고기로 만든 전야를 각각 쌓는다. 제기에는 조청으로 복지를 붙이고, 약과처럼 고임이 어려운 음식은 켜켜이 복지를 넣고 조청으로 붙여 고인다.
▪ 유자정과
해남은 유자가 많이 나는 지역이라, 제사상에도 유자정과가 오른다. 유자를 편으로 썰어서 설탕, 조청을 고아 만든 시럽에 넣고 약한불로 조린 후, 식혀서 설탕옷을 입힌다.
▪ 어만두와 육만두
어만두는 얇게 포 뜬 상어살을, 육만두는 다진 쇠고기로 만두피를 만들고, 다져서 볶은 쇠고기와 삶은 배춧잎을 만두소로 쓴다. 어만두는 소금, 후추로 밑간한 상어포에 준비한 만두소를 한 숟가락 올려서 동그랗게 싸서 만든다.
육만두는 치댄 쇠고기를 얇게 펴서 만두피를 만든 다음 만두소를 넣고 접어서 만두 모양으로 빚는다. 어만두, 육만두는 찌기 전에 황백지단, 대파, 당근, 석이버섯을 고명으로 얹는 후, 김이 오른 찜통에 베보자기를 깔고 각각 찐다. 다 익으면 초간장과 겨자장을 곁들인다.
▪ 족편
소머리와 족을 같이 넣고 기름을 걷어내면서 이틀정도 조리듯 곤다. 삶아진 고기는 뼈를 발라내고, 쇠고기 안심을 따로 준비해 무르도록 푹 삶는다. 준비된 고기를 곱게 다져서 소금과 마늘로 밑간한다.
기름기를 걷어낸 육수를 끓이다가 고기를 넣고 끓인다. 맨 마지막에 한천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틀에 부을 때 황백지단, 당근, 파, 석이버섯을 고명으로 얹어서 굳힌다.
▪ 느름이와 전야
느름이는 채소 부침을, 전야는 고기전을 이르는 말이다. 느름이는 대파, 당근을 길이로 썰어서 꼬치에 꿴 다음 기름에 지진다. 전야는 고기전과 바지락전이다. 쇠고기는 포로 떠서 밑간한 다음 달걀옷을 입혀 지져낸다.
▪ 해삼(천엽 지단말이)
천엽은 뜨거운 물에 데쳐서 손질한 다음 손가락 마디 굵기로 썬다. 밑간 한 다음 얇게 부친 지단으로 돌돌 말아서 기름에 지져낸다.
▪ 산적
쇠고기를 큼직하게 썰어서 위아래를 꼬챙이에 꿴다. 숯불에 속까지 익도록 구운 후 황백지단, 당근 채, 대파를 고명으로 얹는다.
▪ 생선적
생선은 방어, 장대, 돔, 조기, 병어, 상어를 쓴다. 손질한 생선을 통째로 숯불에 구운 다음 켜켜이 쌓고 황백지단과 당근 채를 고명으로 얹는다.
♣ 입 안 가득 상쾌함이 번지는 비자강정
녹우당 뒷산에는 비자나무숲이 있다. 어초은 공이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해서 심었던 비자나무가 숲을 이뤄 500여 년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금은 나무가 오래되고 마을사람들도 늙어서 산에 오르기조차 어렵지만, 한창때는 비자를 몇 섬씩 거뒀다.
가을에 수확한 비자는 항아리에 삭혔다가 껍질을 벗겨서 갈무리해두고 일 년 내내 제사상과 다과상에 오를 비자강정과 비자약과를 만들었다. 비자강정은 비자열매의 독특한 향이 고스란히 살아있어서 씹을수록 입안에 맑은 향이 퍼진다.
▪ 비자강정 만들기
잘 익은 비자열매를 항아리 속에 가득 채워 뚜껑을 덮어 일주일 정도 둔다. 비자가 새까맣게 삭혀지면 껍질을 벗겨 햇빛에 일주일 정도 잘 말린 후 속껍질을 벗겨낸다. 덜 벗겨진 속껍질은 달궈진 프라이팬에 물을 조금씩 넣으며 볶거나 숟가락으로 마저 긁어낸다. 비자에 물엿과 설탕을 2:1의 비율로 섞어 조린 시럽을 바른 후 볶은 실깨, 검은깨를 묻힌다.
♣ 종가의 음식문화를 세상 곁으로 김은수 종부
김은수 종부는 경상남도 통영에서 8남매 다복한 가정에서 둘째 딸로 태어나서 부산을 거쳐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꽃 같던 도시처녀가 종손을 만나 혼인을 한 지 오십 년.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전라도 음식은 친정인 경상도 음식과 간부터 달랐다.
잡히는 생선이 다르니 상 위에 오르는 음식재료도 달랐다. 궁중음식의 영향을 받은 사대부가의 음식은 고명이 화려하다. 어깨 너머로 음식을 익힌 지 십여 년, 결혼 후 12년 만에 서울에서 생활하던 종손이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녹우당으로 돌아왔다.
종손이 내려오니 자연스레 녹우당 살림을 맡게 되었다. 종손과 종부는 30여 년 넘게 다인회를 이끌고 있다. 녹우당 가까운 녹차밭이 푸르다. 종가의 손님맞이도 단아한 백자잔에 담긴 차로 시작한다. 녹차를 가까이 하다 보니 녹차삼색설기, 녹차절편 같은 음식도 생각해냈다.
다과상에 자주 오르는 비자강정은 재료를 구하기 쉬운 땅콩으로 대체할 수 있다. 내림음식을 현재에 맞게 재해석하고 간편한 조리법을 연구한다. 음식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 않으면 뒤처진다고 생각해서다.
일 년이면 수십 차례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상을 차리다보니 언제부턴가 사람들에게 음식을 가르치게 되었다. 유서 깊은 음식들이 솟을대문 너머로 널리 퍼져 두루 즐기는 음식이 되기를 바라서다. 동국장, 진양주는 이미 종가의 문을 넘어 해남지역의 향토식품이 되었다.
♣ 초록비 내리는 녹우당(綠雨堂)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녹우당에는 초록비가 내린다. 마을을 지켜온 비자나무숲의 비호를 받으며 까치지붕이 멋드러진 녹우당이 50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안채는 입향조 어초은 공이 연동에 들어오면서 지은 15세기 중엽 건물이고, 사랑채는 효종이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집을 1668년 수원에서 옮겨온 것이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어부사시사」를 쓴 조선시대 최고의 시조 시인이다.
뿐만 아니라 의약, 천문학, 음양, 지리, 수학 등에도 능했다. 효종이 왕자 시절 사부로 지내기도 했다. 해남 윤씨 윤선도 종가는 연동에 터를 닦은 입향조 어초은 공과 해남 윤씨 가문을 드높인 고산 윤선도 선생 두 분을 불천위로 모신다.
녹우당에는 두분의 사당이 별도로 지어져 있다. 지금은 녹우당, 사당, 유물전시관 등을 고산윤선도유적지로 묶어 관리한다. 유물전시관은 2011한국건축문화대상 사회공공부문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500년 풍파에 낡은 안채를 해체해 보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