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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1. 섬김, 조상의 얼을 기리는 제사상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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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충과 절, 불천위로 피다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

단옷날 자정을 넘기면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 제사가 시작된다. 전국에서 달려온 제관들은 물론 하회마을을 찾아온 관광객까지 대청마루며 마당을 빼곡하게 채우고 선생의 정신을 기린다.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불천위 제사 사진 No1.

♣ 제사의 으뜸, 불천위 제사

단오, 하회마을은 고요하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하회강변 단오놀이에 나선 탓이다. 하나둘 고샅을 오가는 아낙네의 머리에서 싸한 천궁향이 번진다. 층층대문 지나 충효당 높다란 처마 아래에선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 제사 준비가 한창이다.

충효당 내당 부엌에서 음식 장만에 분주한 찬모들의 머리에도 파란 궁궁이가 시원스레 꽂혀 있다. 일손을 거드는 사람들의 바쁜 손놀림, 속속 도착하는 일가붙이들이 풀어내는 푸진 인사, 충효당 처마에 둥지를 튼 제비들이 지저귀는 소리까지, 종가의 분주함에 한몫 거들고 있다.

“점심 전에 오랬더니 와 이리 늦노?” 부엌 옆 대청에 자리잡은 노종부의 웃음 섞인 역정이다. ‘점심은 먹었느냐?’라는 말씀일 테지. 낮부터 하나둘 사랑에 모인 제관들이 의관을 갖추고 제청으로 나온다. 종부와 며느리들도 단정한 차림으로 제청 한켠에 자리한다.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불천위 제사 사진 No2.

돗자리며 향단지며, 제청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과실과 나물 같은 제물을 1차 진설하면 이어 제례가 시작된다. 시간은 막 자정을 넘기고 있다. 초헌관과 축관, 집사가 사당에 가서 고하고 신주를 모셔오면, 모든 제관이 두 번 절하며 조상을 맞이한다.

향을 피우고, 모삿그릇에 술을 부으면 조상신이 신주에 깃들어 본격적인 제례가 진행된다. 탕과 도적(都炙) 등 1차 진설에 빠진 제물을 모두 올린다. 축문을 읊고 제관들이 돌아가며 술을 올리고 나서 조상님이 편히 제물을 드시도록 병풍을 두르고 불을 끈다. 제관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후손들이 평안하게 살도록 보살펴준 은덕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쭉 살펴주시라 청하는 것이다. 시간은 가없이 흐른다. 병풍을 걷고 숭늉을 올린다. 숟가락을 걷고 메뚜껑을 덮는다. 집사가 제를 순조롭게 마쳤음을 알리고 축문을 태우는 것으로 제사를 마친다. 축시(새벽 1~2시)에 제를 모셔야 하지만 요즘에는 12시를 넘기면 제를 모신다.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불천위 제사 사진 No3.

♣ 서애 선생 불천위 제사상차림

유교의 제례풍습이 고스란히 남아, 육고기·물고기를 생으로 올린다. 숙수를 청해 좌반과 도적을 괸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중개다. 서애 선생이 즐겨 먹던 궁중음식인데, 밀가루를 반죽해서 기름에 튀긴 과자다. 과일과 나물, 탕을 차리면 제사음식 준비가 끝난다.

▪ 떡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불천위 제사 떡

본편으로 각 편을 열세 켜 쌓고 준비해둔 웃기 9종을 색깔 맞춰 한 켜씩 고인다. 시루편은 콩고물편, 거피팥편, 진주고물(녹두)편, 나물편, 백편을 준비해 열세 켜 쌓는다. 스물두 켜나 층층이 쌓아야 하니 두께가 고른 떡을 골라 부서지지 않도록 도마에 옮기는 것부터가 정성이다.

떡판에 맞춤한 나무토막을 자 삼아 맞춤하게 떡을 자른다. 각이 서도록 떡을 자르고 두 사람이 합을 맞춰 떡을 괸다. 각 편을 열세 켜 쌓고 나면 준비해둔 웃기를 색깔 맞춰 한 켜씩 고인다. 콩고물 경단을 시작으로, 증편, 송기송편, 백송편, 모싯잎송편, 잡과편, 전, 조악, 깨구리까지 아홉 가지다. 다 쌓은 떡은 쓰러지지 않도록 대청벽에 기대어 둔다.

▪ 중개仲介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불천위 제사 중개仲介

밀가루에 소금, 꿀, 설탕을 넣고 섞은 뒤 막걸리를 넣고 반죽해서 1시간 동안 숙성시킨 다음, 방망이로 밀어서 직사각형으로 잘라서 기름에 튀기듯이 지져낸다. 중개는 종이로 만든 그릇에 1단에 4개씩 21단 괴어 올린다.

▪ 증편

떡에 웃기로 오르는 증편은 밥을 푹 끓여서 멥쌀가루, 설탕, 소금, 따뜻한 물을 섞어 반죽한 후 생막걸리를 넣어서 잘 섞은 다음, 발효시켜서 찐 떡이다. 소는 거피팥에 볶은 콩가루, 계핏가루, 꿀을 넣어 섞은 다음 둥글납작하게 빚어서 쓴다. 찜통에 반죽 한 숟가락을 놓고 팥소를 올린 후 다시 반죽으로 덮는다. 잣, 대추, 석이버섯을 채 썰어 고명으로 올리고 찜통에 쪄낸다. 한 개씩 감잎으로 싼다.

▪ 도적都炙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불천위 제사 도적都炙

도적은 제물의 의미로 생물을 올리는데, 북어, 고등어, 청어, 돔배기(상어), 가오리, 방어, 쇠고기 순으로 괴고, 살짝 데친 문어와 생닭을 올린다. 제사를 마친 후, 도적은 음복으로 나누고 좌반은 종가의 몫으로 한다.

▪ 좌반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불천위 제사 좌반

좌반은 도적을 보좌하는 제물로, 북어, 고등어, 청어, 돔배기, 가오리, 쇠고기 순으로 괴고 맨 위에 조기 두 마리를 얹는다.

▪ 어포魚脯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불천위 제사 어포魚脯

어포는 대구포에 문어 다리, 꼬치에 꿴 홍합을 얹는다.

▪ 나물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불천위 제사 나물

백채로 도라지, 무, 콩나물을 한 접시에 담고, 청채는 고사리, 미나리, 시금치, 가지, 오이, 배추 중 다섯 가지 나물을 준비해서 한 접시에 담는다.

♣ 조상께서 내리는 복을 받다, 음복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불천위 제사 사진 No4.

제사의 진정한 마무리는 음복(飮福: 신이 내리는 복을 받는다)에 있다. 모든 제관과 참사객들이 음복 비빔밥과 탕국을 나눠 먹는다. 제관들의 지위에 맞춰 외상이나 겸상으로 음복상을 차린다. 종손과 종부는 참사객이 빠짐없이 음복할 수 있도록 자리를 챙긴다.

새벽 1시를 훌쩍 넘기니 시장기가 돈다. 제물로 올랐던 나물을 고루 넣어 비빈 음복 비빔밥은 슴슴하고 고소한 맛이 야식으로 과하지 않다. 익혀서 제사상에 올렸던 문어와 돼지고기를 편으로 썰어 상에 내고, 나머지 과일, 생고기, 어물, 떡은 참사객 수에 맞춰 고루 나눠 담는다.

떡 한쪽이라도 고루 나누고, 음복 음식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챙겨가도록 잘 살피는 것도 종부의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음복을 나누는 사람 모두 서애 선생을 기억하고, 제사에 참석 하지 못한 사람들도 귀한 음식을 맛보도록 한 종가의 배려다.

♣ 평생 나누고 베푸는 종부의 삶 최소희 종부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최소희 종부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 14대 최소희 종부는 ‘경주 최부자’집 둘째딸이다. 언니는 거창 동계 선생 댁에 종부로 시집을 가고 최 할머니는 스무살에 서애 선생 종가 맏며느리로 시집을 왔다.

옛 사람들이 “경상감사를 할래? 서애 종손 할래?”라고 하면 경상감사 안 하고 서애 종손 한다는 말에 어린 맘에도 서애 종손이 굉장히 좋은 자린가 보다, 생각했다. 인연인지 숙명인지 최 할머니는 결국 서애 집안의 14대 종부가 되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현 연세대)을 중퇴하고 동덕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남편 류영하 씨를 따라 서울에서 생활하다, 1973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울생활을 접고 종가로 내려왔다. ‘봉제사 접빈객’의 종부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최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배고픈 사람 밥 주고, 노자 없는 사람 돈 주는’ 나눔과 베풂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대가의 살림과 손님을 치러온 친정어머니를 보면서 자라온 최 할머니에게 종부의 삶은 어쩌면 운명처럼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여든이 넘은 종부는 지금도 친정의 가양주인 경주 교동법주를 직접 빚어 제주(祭酒)로 올리고 있다.

♣ 나라에 충, 부모에 효, 충효당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종가」종가 충효당

안동 하회마을에 자리한 충효당은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의 종택으로 보물 414호로 지정되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임진왜란 때 재상으로 이순신 장군이 죽고 파직한 후 고향에 내려와 『징비록』을 썼다.

『징비록』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기록한 책으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과 전황 들을 자세히 기록했다. 7년 동안의 각국의 외교상황과 전란에 활약한 중요 인물뿐만 아니라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상까지 담고 있다.

지난날을 통탄하며, 잘못을 반성하며 앞날에 대비한다는 뜻으로 ‘징비록’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서애 선생의 말씀을 받들어 당호를 ‘충효당(忠孝堂)’이라 지었다.

사랑에 걸려있는 충효당 현판은 조선 중기 남인의 영수이자 동방전서체의 일인자였던 미수 허목이 쓴 것이다. 충성 충(忠)은 임금을 상징하는 해를 받드는 모양이고, 효도 효(孝)는 노인을 공경하는 모습, 집 당(堂)은 지붕 아래 사람이 앉아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충효당 이름의 의미가 고스란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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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농사로 •Rda 인트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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