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빈풍시(風詩)를 강독하는 것을 인해서 말하기를, “당 태종[唐宗]의 무일 산수도(無逸山水圖) 전후(前後)가 다른 것은 단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태함을 경계한 것입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숙(李)의 집안에 농가사시(農家四時)의 그림 병풍이 있는데, 관람(觀覽)하기에 적합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청컨대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들여오게 하여 본을 떠서 병풍을 만들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수항이 또 말하기를, “학문을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것은 식견이 몸에 배도록 끊임없이 하는 것이며, 욕심대로 마구 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김수항이 또 말하기를, “강원 감사(江原監司) 정시성(鄭始成)이 장계하여 내국(內局)에 춘등(春等)으로 바치는 인삼(人蔘)을 적당히 줄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백성을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참작하여 줄여 주는 거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30근(斤)에서 그 절반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송광연(宋光淵)이 말하기를,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묘호(廟號)를 추가하여 올리는 일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성대한 거사입니다. 그런데 더러는 위판(位版)을 깎아 버리고 고쳐서 쓰는 것을 미안(未安)하게 여깁니다. 묘호와 시호(諡號)를 이미 추가하여 올렸으니 위판을 고쳐서 쓰는 것은 적합한 일인 듯합니다. 삼가 듣건대 효종조(孝宗朝) 인열 왕후(仁烈王后) 부묘시(廟時)에도 가상(加上)한 휘호(徽號)를 위판에다 고쳐서 쓴 전례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깎아 버리고 고쳐서 쓰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 고쳐 쓰지 않는다면, 위판에 쓰인 것이 장차 축문(祝文)에서 일컫는 것과 다를 터이니, 아마도 미안할 듯하다. 그리고 인열 왕후의 위판을 고쳐서 쓴 전례가 있으니, 지금도 여기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시호(諡號)는 당연히 책보(冊寶)에 기재되어 있으며, 묘호(廟號)의 경우는 축사(祝辭) 외에 달리 쓸 말한 곳이 없으니, 위판을 고쳐서 쓰는 것은 불가한 듯합니다. 다만 태묘(太廟)의 열성(列聖) 위판에 쓰인 것이 축사에서 일컫는 바와 서로 틀리는 것이 많지만 일찍이 고쳐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정 대왕의 위판만 고쳐서 쓰는 것은 다르다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여러 대신과 지방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물어보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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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인삼, 人蔘
전통식품백과, 한방식품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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