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았으니 돌려주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공양으로 얻은 에너지는 수행으로 되돌린다. 참선도량답게 축서사는 숨소리조차 조심스럽다. 업業을 위해 받는 것은 적게 하고. 되돌리는 것은 혼신運身으로 한다.
공양간의 연기법緣起法도 같은 이치이다. 공양을 올리는 사람도 공양을 받는 사람도 수행의 연속이다. 화려한 조리법이나 식재료의 지위고하가 무색하다. 공양을 받고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 화두를 두고 참선하다 보면, 공양은 더 이상 음식이 아니다.
차라리 큰 숙제이다. 무한한 자기통찰과 식탐을 직시하며 공양과 대면한다. 모든음식 앞에서 직면하는 인간의 본심이 불법과충돌한다.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얼마만큼 가져가야 뒷사람까지 공양이 이어질까? 오관게를 염두에 둘 마음의 여유가 없다.
탐심이 발동한다. 매 끼니마다 모든 음식마다 마음의 고뇌와 번뇌를 마주한다. 사찰음식 문화를 연구하고 탐색하는 것조차도 무의미함과 직면한다. 축서사의 점심공양은 자연 그대로이다. 밭에서 방금 가져온 듯한 감자를 삶아 공양한다. 무와 표고버섯을 고추장으로 조리고 열무와 배추, 무청 시래기와 상추를 절여 공양하였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콩고기와 콩자반도 준비되었다. 비록 콩으로 만든 고기이지만 인조고기가 마음에 거슬린다.『열반경』에 가섭존자가 부처님께 “고기를 왜 허락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니, 부처님은 “고기를 먹으면 자비의 종자가 끊어진다”고 답하였다.
이어 “왜 전에 사람들에게 삼종정육三種淨肉이나 구종정육九種淨肉2)은 먹도록 허락 하셨는가”라고 물으니, 부처님은 “그것은 그들이 즉시 육식을 끊지 못할까 염려해서이고 임시방편이다. 서서히 고기 먹는 것을 끊도록 인도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조고기는 육식에 익숙한 대중들도 같이 공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아욱된장국이 비오는 축축한 날씨를 데워준다. 최소한의 조리로 공양된 점심공양은 재료가 주는 신선함을 이해하고 사찰음식이 자연음식임을 깨닫게 했다.
공양간 한 벽면에 발우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주로 아침공양에 사용하신다는 발우는 법도에 따라 공양을 하여야 해서 신도들과 함께 공양하는 점심공양에는 사용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