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문화이다. 자연환경의 영향을 기본적인 전제로 구성원들의 사회적 관계와 역사적 산물에 의해 만들어진다. 부산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이동에 대한 검토는 부산의 음식문화를 이해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부산의 자연환경은 약 70%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 남 방향은 바다가 연해있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논농사보다 수산업과 관련된 산업이 우선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수산업은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다지 발달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의 수산업에 커다란 변화를 보이는 시기는 1876년 개항과 조선연해에서의 일본인들의 어로활동, 1900년 이후 이주어촌의 건설 등 역사적 환경이 변화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부산에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어촌을 건설한 사례는 기장 대변, 남구 용당, 영도, 다대포, 하단 등이 대표적이다.1) 이들 이주어촌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토착민과 협력하기도 하고, 조선인에 비해 앞선 어업기술을 사용하면서 정착해 갔다.
명지와 하단에서 김양식이 시작되는 것도 1910년을 전후해 이주한 일본인 泊友吉이었다고 한다.2) 기장 대변항은 멸치잡이, 용당은 청어, 멸치, 다대포에는 청어, 멸치, 고등어, 하단에는 패류, 해조류 등을 주로 취급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하류의 김해평야 조성 또한 1905년을 전후한 일본인들의 낙동강변 투자확대와 밀접하게 관련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지배력이 공고화되는 과정에서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경제적인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 농지 개간사업에 열을 올렸다.
낙동강변 개간사업이 대표적이었다. 창원군 대산면 일대, 밀양시 수산, 하남, 삼남, 삼랑진 일대의 개간사업은 유명하다.3) 낙동강 하류인 김해평야 또한 이 무렵부터 부분적으로 개간사업이 진행되다가 1930년대 낙동강 하류를 동낙동강 중심의 일천식 하천으로 변경하고 제방을 쌓으면서 완성되었다.
이에 따라 김해평야를 관통하는 서낙동강은 농업용수로 활용하게 되었다. 1932년 대저와 구포역 앞을 연결하는 구포대교의 완성은 김해평야의 생산물 유통을 구포역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김해평야를 중심으로 쌀 농사는 물론이고, 부산이라는 대도시에 공급하기 위한 각종 야채류, 무엇보다 대저에는 부산의 덴마크라고 할 정도로 배, 토마토 등을 많이 재배하였다. 그리고 낙동강과 접하고 있어 강에서 서식하는 재첩, 우렁이 등이 이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요한 음식재료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식민지시대 일본인의 한반도 거주와 주요 산업의 주도는 조선인들의 자생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요소가 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인들의 농업과 수산업 기술을 익히는 과정 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수산업 용어의 다수가 일본어로 남아있음은 이를 증명 한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일본식 음식 문화가 조선인에게 잔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맑은 국물 생선국이나 어묵, 초밥, 메밀국수 등은 일본인들이 이 땅에 살다가면서 남긴 음식문화였다. 1944년 현재 약 6만 명 이었던 일본인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해외에 나가있던 조선인들은 귀국하였다. 이들을 우리는 귀환동포라 한다. 부산항을 통해 돌아온 귀환동포는 약 250만 명 이었다. 이 가운데 약 20만 명이 고향으로 가지 않고 부산에 체류하였다.
귀환동포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돌아왔다. 그들의 생활에 익숙해 있었던 일본 문화, 부산에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일본적인 요소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중앙동에는 일본식 음식점이 개업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은 기존 일본식 문화를 일정정도 해체시키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에는 남한 내 타지역 피난민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에 의한 문화변화가 컸었다.
이북 피난민들은 1.4후퇴 이후에 집중적으로 내려왔는데, 전쟁 중에는 곧바로 부산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인근의 거제, 마산, 울산 등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 부산으로 이주해 왔다.
1949년 약 40만 명이었던 부산인구는 전쟁을 지나 1955년이 되면 100만 명을 넘게 되었다. 이북 피난민들의 영향으로 부산에는 이북의 음식문화가 두드러지게 증가하였다. 이북사람들이 좋아하는 냉면, 순대 같은 음식점들이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돼지국밥처럼 동물성 단백질을 활용한 음식들도 새로운 형식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물자의 수입이었다. 원조물자 가운데는 식료품으로 밀가루 도입이 많았다.
1950년대 원조자금에 의한 밀가루 도입 혹은 밀가루 산업이 급성장하였고, 이를 재료로 하는 중국음식이나 국수가 새로운 음식문화를 주도하였다. 1960, 70년대는 부산이 우리나라 최고의 공업도시로 발돋움하는 시기였다. 섬유, 신발, 목재로 대표되는 부산 산업은 타지역의 인력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본격화되는 원양어업과 연안어업의 발달 또한 선원들의 집중을 유도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부산으로 모였다. 그 가운데 경상남도는 물론이고 전라남도와 경상북도 출신자들이 많았다. 경공업 시설의 노동자와 어선의 선원으로 취업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호남인들의 급증은 부산 내 새로운 음식문화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검토한 것처럼 부산으로 유입되어 정착한 부산 사람들은 특정 지역출신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한국전쟁과 근대화 과정으로 부산에는 다양한 출신자들의 전시장이 되었다. 그런 만큼 부산에는 이들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할 수 있었다. 음식문화도 그러한 특징이 반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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