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램프쿡 로고
    • 검색검색창 도움말
  •   
  • 영접도감의궤

  • SNS 공유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톡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Chapter 1. 이야기
  • 이동

h2mark 영접도감(迎接都監)

1368년에 명(明, 1368~1662)나라가 개국한 이후 위화도회군에 뒤이어 등극한 태조(大祖, 재위 1392~1398)는 명에 대한 외교 수립에 세심하게 노력하였다. 국제 질서에서 조선왕조가 처해 있었던 상황은 대명(對明) 의존도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무형의 지배 형태로 나타나, 조선왕조 건국 이후 가장 번잡하고 지성으로 대한 것이 대명외교이고, 명나라는 명실상부 한 종주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므로 명나라에서 오는 사절은 최선을 다하여 후대를 받았다.

만약 명사(明使)에 대한 소홀한 태도는 명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명사 영접은 조정의 상하가 일심 단결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이러한 명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로 명은 임진왜란을 겪을 때 조선정부에 군사를 파병해 도와주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정부와 명나라는 더욱 끈끈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광해군 15년(1623) 김유, 이서, 이귀, 이괄 등의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과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때에도 명나라와는 긴밀한 관계에 있었지만 인조가 즉위하기 7년전인 1616년 누루하치가 흥경(興京)에서 태조(太祖)라 칭하고 후금(後金)을 세운 상태 였으므로 국제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누루하치의 아들 태종(太宗, 재위 1626~1643)이 국호를 청(淸)이라 하면서(이때의 수도는 심양이었음. 심양으로 천도한 해는 인조 3년임) 조선정부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옴에, 척화론(斥和論, 화의和議를 물리침)의 주장에 따라 이를 배격하자, 청 태종은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인조 14년(1637) 12월에 쳐들어오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이에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다음해 1월에 삼전도(三田渡)1)에서 항복하여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명의 수도였던 북경이 청에 함락당한 해가 1644년이니까 명나라는 청에 밀리기는 하나 여전히 존속해 있었다. 인조 20년(1642) 10월 13일에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봉성(鳳城)으로 나와서, 조선사람이 명나라 선박을 접대하고 명나라와 비밀 무역을 하였다는 이유로 관련된 사람을 심문하였다.

이때 선천부사(宣川府使) 이계(李桂)는 조선 정부가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을 낱낱이 고해바치면서 척화오신(斥和五臣, 신익성, 신익전, 허계, 이명한, 이경여)이 청국을 반대하는 주동자라고 말하였다.2) 이에 같은 해 12월 청사(淸使)가 와서 결국 오신에게 칼을 채워 심양으로 잡아갔다.

인조 21년(1643) 2월 11일 청 태종은 신익성과 신익전을 풀어주고, 허계, 이명한, 이경여를 구금하였다. 2월 19일에는 이명한과 이경여에게 각각 은 1,000냥을 바치고, 허계는 은 600냥을 바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는 이들 신하를 사형하지 않고 풀어 준 것에 대해 칙서를 가진 사신을 조선에 보낼 것을 결정하였다.3)

조선정부는 청사(淸使)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영접도감(迎接都監)을 설치하고 영접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정태화(鄭太和)를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병자호란 이후 명사(明使)에게 제공된 지극정성을 다한 영접의례는 고스란히 그대로 청사(淸使)에게로 이행되었음은 물론이다.

영접도감이 일단 설치되자 사신 접대 임무를 총괄하는 수장인 관반제조(館伴提調) 1원(員)이 임명되고, 부서로서 임시 관청인 응판색(應辯色, 사신이 쓰는 물건을 내주는 일을 맡아 보는 분장), 연향색(宴享色, 사신 접대 잔치를 맡아보던 분장), 미면색(米麵色, 조석의 쌀, 국수, 술, 타락, 시탄, 약, 과일 등을 담당하는 분장), 반선색(飯膳色, 삼시반을 위한 술, 고기, 닭, 생선, 시탄, 쌀, 콩 등을 담당하는 분장), 잡물색(雜物色, 다담과 조반(早飯)을 담당하는 분장), 나례색(儺禮色, 헌가, 재인(才人)을 담당하는 분장) 등이 설치되었다.4)

3월 25일 칙사(勅使)로 상사(上使) 포(布), 부사(副使) 양(楊), 대통관 정명수(鄭命壽, 정역鄭譯이라고 함), 일등두목(一等頭頭, 무역을 하러 오는 사신수행원) 4인, 삼등두목(三等頭頭) 5명(가정家丁 2명 포함)으로 구성된 청사들이 경성으로 입경하였다.5)

입경 전에 명사(明使)에게 했던 것처럼 의주의 용만관과 의순관, 정주의 영훈루, 안주의 안흥관, 평양의 대동관, 황주의 객관, 개성의 태평관에서 7차례 연향을 베풀었다.6) 입경 날에 임금은 병으로 성문에 나가서 청사를 맞이하지 못하였고 양화당(養和堂)에서 접견하고 칙서를 받아 읽었다.7)

3월 25일부터 청사들이 귀국하는 날인 4월 6일까지 연향색을 중심으로 연향을 치르고 그 전말(前未)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1643년의『영접도감연향색의궤(迎接都監宴享色儀軟)』인데, 이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11회의 연향을 치르고 있다.

• 3월 25일, 두목들에게 편전에서 연회를 베픔

• 3월 26일, 별다담(別茶啖)

• 3월 27일, 별다담

• 3월 28일, 하마연(下馬宴, 환영연)을 모화관 식연청에식 형함

• 3월 29일, 한강유관

• 3월 30일, 익일연(翌日宴)읕 모화관 식연청에식 형함. 이때 회례연(回禮宴)은 익일연에식 검형함

• 4월 1일, 별다담

• 4월 2일, 별다담

• 4월 3일, 별다담

• 4월 4일, 상마연(上馬宴, 환송연)읕 모화관 식연청에식 형함. 이때 별연(別宴)은 상마연에식 검형함

• 4월 S일, 별다담

• 4월 6일, 전연(餞宴)을 모화관 식연청에식 형함.8)

즉, 별다담이 6번이고, 한강유관이 1번이며 공식적인 연회는 하마연, 익일연, 회례연, 상마연, 별연, 전연의 6번 연회이지만 회례연은 익일연에서 겸행하고 별연은 상마연에서 겸행하였으므로 4번 연회로 끝냈기 때문에 총 11회의 연향이 된다. 연향에서 차린 음식상의 규모는 청사들의 신분에 따라 철저히 달랐는데, 이들 상차림을 나타낸 것이 <그림 1>에서 <그림 8>까지이다.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식품자원부 전통한식과
  • 자료출처 바로가기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바로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