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곰손 에디터의 좌충우돌 술 빚기 1탄
나는 술을 좋아한다. 사랑해마지 않는다. 스무 살, 그러니까 법적인 어른이 되고부터는 맨 정신으로 잠드는 날보다 가열 찬 음주의 밤이 훨씬 많았고, 술이 빠진 만남은 아무리 뜨거운 애정남과라도 그저 맨숭맨숭하기만 하다.
아빠의 즐거운 음주생활이 일생 편치 않았던 엄마 왈, 내 몸 속에는 대대로 술고래 집안의 피가 흐른다. 그것도 아주 콸콸 말이다. 나는 요리잡지 에디터다. 세상의 모든 음식을 레시피로 공식화하고 글로 그려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주방에 서면 서툴기 짝이 없는 곰손 신세다.
자식들이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일일이 당신 손으로 거둬 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엄마가 핑계라면 핑계.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반찬 택배를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내 요리 솜씨는 20년 자취 경력에도 지지부진하다. 맛을 탐하는 입을 가졌을 뿐, 그것을 이루어내는 손은 지니지 못한 비극적 존재랄까.
그런 곰손이 언감생심 술을 빚다니. 본디 술이란 원하는 만큼 사서 취하게 마시는 데 효용가치가 있는 ‘공산품’ 아니던가. 20대 때는 청춘의 기쁨과 슬픔을 읊으며 맥주를 물처럼 들이켰고, 30대에는 슬기로운 사회생활을 핑계 삼아 수많은 과장부장님들과 소주잔을 돌렸다.
취하려 마시는 술이 음미하는 술로 바뀐 건 2년 전, 요리잡지에서 일하고부터다. 더 콕 짚어보자면 우리 전통주와 세계 음식 사이의 마리아주를 찾아보는 칼럼을 진행 맡고부터다.
♣ ‘에디터 김’은 왜 술 빚기에 도전했나
세상만사 첫 경험이 다 그러하듯이, 처음 맛본 술의 신세계는 지금도 입 안 가득 생생하다. ‘물맛이 으뜸’이란 이름의 고찰 수왕사(水王寺)에서 빚은 송화백일주와 소문난 양구이집 이치류의 삿포로식 칭기즈칸 요리. 그 둘을 어울려 맛보는 것으로 나의 첫 경험은 시작했다.
“맑은 솔향기 뒤로 단맛이 차분차분 내려앉는 느낌이에요. 아, 이 오묘한 단맛이 송홧가루라고요? 도수가 38도나 되는데도 소주처럼 쿡 찌르는 감 없이 보드랍게 넘어가는데, 그건 왜죠? 솔잎에 한약재까지 꽤 다양한 맛을 섞었는데 그게 또 하나처럼 조화로워요.
이럴 수가!” 송화백일주 한 모금이 혀끝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불러일으키는 미각의 동요. 칭기즈칸에도 곁들여보았다. 양고기 특유의 향을 지긋하게 누르며 입 안 가득 기분 좋은 단맛이 번진다. 술과 음식의 풍미가 서로를 이끌며 하나로 녹아들 때의 기쁨이란.
그간의 단조롭기 짝이 없던 음주생활을 반성하기에 충분한 풍요로움이었다. 사람과 사람은 제각각이다. 마찬가지로 술과 술도 저마다 다른 풍미와 깊이, 매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전통주 하나하나를 맛보며 깨달았다. 부어라 마셔라 들이키던 술에서 천천히 풍미를 음미하는 술로 획기적 전환이 이뤄졌다.
음주인생 20년 만에 이뤄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오묘한 풍미의 근원을 알고 싶다는 호기심, 내 취향을 저격하는 술을 직접 빚어보겠다는 도전의식, 누군가와 그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에서 나의 술 빚기는 시작됐다.
비록 타고난 곰손에게는 호기로운 실험이었고, 그리하여 좌충우돌의 연속이 되었을지라도. 지금 내 작은 주방에는 재료와 제법을 달리하며 담근 술들이 아롱이다롱이 익어가고 있다.
♣ 첫 도전은 빠르고 쉬운(?) 것부터
전통적으로 술은 밑술에 덧술을 거듭하는 방식으로 담근다. 덧술 할 때마다 발효가 다시 왕성하게 일어난다. 발효는 술의 특징인 알코올을 만들어내고 술에 표정을 불어넣는 양조의 기본 과정. 덧술 없이 바로 거르면 한 번 담그는 술이라 해서 ‘단양주’고, 덧술을 한 번씩 더할 때마다 이양주, 삼양주, 사양주, 오양주라 부른다.
그렇다면 곰손 ‘에디터 김’의 첫 도전은? 당연히 한 번에 끝내는 단양주다. 덧술 횟수가 늘수록 좌절감만 깊어질 게 분명하니까. 술독에 안쳐 열흘만 인내하면 된다하니, 어서 빨리 ‘내 술’을 마시고 싶은 조바심도 한 몫 했다.
▸ PRE 재료를 준비합니다.
찹쌀 2.2kg, 누룩(백곡) 300g, 물 3.5L
어라? 생각보다 간소합니다. 전통주는 온전히 좋은 쌀과 개성 있는 누룩, 맑은 물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 STEP 1 쌀을 ‘백번’ 씻어요.
찹쌀을 씻습니다. 백번 저어 씻는다 해서 ‘백세한다’고 하지요. 물을 버리고 다시 채워 씻기를 반복합니다. 맑은 물만 나올 때까지요. 다음은 물에 불릴 차례입니다. 3시간 정도면 충분하다네요. 불린 쌀은 깨끗한 물에 한 번 더 헹군 다음 체에 밭쳐 물기를 뺍니다. 1시간 기다릴게요. 이쯤이야, 홍홍~
▸ STEP 2 고두밥을 짓습니다.
매일 먹는 밥은 물에 끓여 짓잖아요. 고두밥은 스팀으로 찐 밥입니다. 찰기 없이 고들고들해서 고두밥이지요. 불린 찹쌀을 시루에 편평하게 안친 다음 김 오른 찜기에 시루 채 올려 40분간 폭폭 찝니다. 이 정도면 다된 걸까? 아차, 고두밥도 뜸은 들여야지요. 약불로 줄이고 20분만 더 기다릴게요.
▸ STEP 3 밥을 펼쳐 식힙니다.
바닥에 면포를 깔고 갓 지은 고두밥을 쏟아 붓습니다. 주걱을 세워 잡고 툭툭 끊어주듯이 재빨리 펼쳐주고, 가끔씩 아래위를 뒤집어 소외된 부분 없이 고루 식혀줍니다. 밥 여기저기 손등을 얹어봐 ‘오~ 차갑네’라고 느껴지면 끝. 것보다, ‘오마갓! 술은 그냥 사먹는 걸로’라며 고단함을 토로할 즈음 끝.
▸ STEP 4 누룩을 섞어줍니다.
식힌 고두밥에 누룩을 대강 보슬보슬 섞어줍니다. 오늘 누룩은 밀가루로만 만들어 새하얀 백곡을 가루 내 썼습니다. 백곡으로 발효한 술은 노란빛이 여리여리 곱고, 발효 향이 프레쉬~하다네요. 술은 담그는 이의 개성이 묻어난다더니, 절 닮아 어여쁘고 상콤한 술이 빚어질 참입니다. 흠흠…부끄부끄.
▸ STEP 5 물을 섞을 차례에요.
물을 붓고 조물조물 섞어줍니다. 밥알이 알알이 떨어지면서도 으깨어지진 않을 만큼 적당한 힘 조절이 포인트! ‘이제 다 섞였잖아요’ ‘언제까지 해야 하나요’ ‘원래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술은 남기지 않겠어요’라는 둥 낭패감을 쏟아낼 즈음, 밥에 물이 스며들어 잦아듭니다. 자작자작, 딱 그 정도면 됩니다.
▸ STEP 6 술밑을 앉힙니다.
자취집에 항아리가 있을 리가요. 흔한 플라스틱 술통을 깨끗이 닦아 술밑을 앉혔습니다. 통에 60~70%만 채워 공기 중에 떠다니는 곰팡이와 가능한 맞닿지 않도록 합니다. 입구에 면포를 씌워 고무줄로 봉하고, 끝자락을 접어 포갭니다. 고백하건데 이 깔끔하고 야무진 마무리는 사실, 제 술 선생님 진향술연구원 안진옥 원장님의 솜씨랍니다. 흘리고 묻히고… 보다 못해 선생님이 직접 나섰다는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 STEP 7 열흘을 인내합니다.
발효에서 직사광선은 사양합니다. 투명한 술통에 쿠킹호일을 둘러싸서 전통적인 술독처럼 햇볕을 차단해줍니다. 오~ 감쪽같아요. 거실 한 켠에 두고 열흘간 눈싸움만 했습니다. 아, 3일쯤 됐을 때 술독을 열어 긴 주걱으로 휘휘 저어주었고요. 그리곤 계속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초조하고 설렜다지요.
▸ STEP 8 드디어 술을 걸러요.
촘촘한 거름망에 발효된 술을 붓고 아래에 고운체를 밭쳐 걸러줍니다. 빨리 거르려고 거름망을 억지로 짜내면 쌀알이 깨져 술이 탁하고 텁텁해진다고 해요. 하아~ 술, 너란 녀석 참 까다롭다. 인고의 심정으로 걸러낸 술은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서 앙금을 가라앉힙니다. 위에 고인 맑은 술만 따라 마십니다. 완전히 맑은 술을 얻는 데까지는 넉넉잡아 3개월은 걸린다는데요, 하아~ 술, 너란 녀석…
▸ STEP 9 막걸리를 ‘막’ 뽑아요.
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는 거름망 채로 물 9L를 혼합해 주무릅니다. 열심히 주무를수록 곡향 구수한 막걸리가 된다고 하니 거침없이 짜내도 되겠어요. 물을 짜내고 다시 거름망에 스미게 하고 또 다시 짜내는 과정을, 스트레스가 다 풀릴 만큼 반복한 다음 체에 거릅니다. 씬~나게 바로 들이켜요. 캬아~ 막걸리를 거르는 날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