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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0. 탁재형 PD의 우리술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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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경북 문경 오미나라’

♣ 경기도 평택 ‘찾아가는 양조장’ 좋은술

일찍이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좋은 술이 없는 곳에 좋은 삶이란 없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 술자리를 꼭 필요로 하는 술꾼에게는 너무나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말이 아닐 수 없지만, 사실 이 말엔 만만치 않은 철학적 함의가 담겨 있다.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인가?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좋은 술’이란 또 어떤 술인가?

‘좋은 삶’에 대한 탐구는 종교인과 철학자들이 이 시간에도 열심히 하고 있을 터이니, 그 분들에게 맡겨 놓는 것으로 하자. 우리 술꾼들의 입장에서는 과연 ‘어떤 술이 좋은 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일생의 술자리를 걸어도 좋을 화두이자 성배일 터다.

이번 연재를 시작하는 내 입장에서도, 그것은 취재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주제가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처음 찾아간 양조장의 이름이 <주식회사 좋은술>이란 것에서는 뭔가 운명의 향기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서 앉으세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단 차려놓은 것부터 좀 드세요.”

한눈에도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게 생긴 남편과, 손끝 매섭게 생긴 부인. <천비향>이라는 우리 술 브랜드로 유명한 평택의 <좋은술>을 운영하고 있는 김승우, 이예령 부부다. 무심하게 던진 말 같았지만, 이미 상 위에는 정성이 한껏 들어간 안주들이 그득했다.

자잘한 건새우가 듬뿍 뿌려진 미나리 전, 블루베리를 얹은 두부조림, 방풍나물과 쑥 튀김, 그리고 크림치즈를 얹은 곶감. 재료들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들인데, 그것들을 조합하고 담아낸 손길이 예사롭지 않다. 손을 뻗어 그 모양새를 흩트리기가 망설여질 정도다.

“아유, 뭐 특별한 것도 없어요. 다 주변에서 나는 거고, 우리 술에 어울리겠다 싶은 것들로 몇 개 차려 본 거예요.”

이예령 대표가 손사래를 친다. 먼 곳까지 술맛을 보러 온 술꾼에게, 아직 차가움을 품고 있어 이슬이 맺힌 술병이 주욱 늘어선 모습보다 더 설레는 것이 있을까. 테이블 한편엔 <천비향>의 이름으로 판매되는 술들이 손님을 맞을 채비를 마친 채 도열해 있었다.

“일단은 8도짜리부터 맛을 보시죠. ‘택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평택’의 ‘택’일 수도 있겠고, ‘택’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을 위한 이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약간은 ‘응답하라 시리즈’같은 감성을 담았다고 할까요.” 김승우 부사장이 술을 권하며 말했다.

잔에 담긴 술은 보드라운 아기의 살결과도 같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술은 입안에 언제 머물렀냐는 듯 사라졌다. “일체의 인공감미료를 넣지 않고 쌀과 누룩만으로 만들어 6개월간 숙성을 거쳤습니다. 일반 막걸리보다 도수가 높지만, 목 넘김이 좋아서 여름에 시원하게 마시기에 좋습니다.”

“인공적인 맛이 빠져 있고 곡물의 단맛만 있으니까 단맛의 격이 다르네요.” “그럼 이제 10도짜리 맛을 보실까요. 제품명은 ‘술 그리다’입니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막걸리, 아니 탁주(濁酒)를 마셔보고 말이 없어지긴 오랜만이었다. 사실은 이번 취재에 나서면서, 전통주를 만드시는 양조장 분들을 만날 때마다 좀 부탁드리고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바로, ‘조금만 덜 달게 만들어 주십사’하는 거였다.

단 술이 좋지 않은 술이 아니고, 단맛이 다 나쁜 맛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게다가 우리 술 중 많은 제품은 이미 아스파탐이나 스테비오사이드 같은 인공감미료와 결별한 지 오래다. 쌀과 누룩만으로 빚은 술에서 나는 단맛이란, 곡물이 누룩의 힘으로 당화(糖化) 해 만들어진 자연의 맛이다.

밥을 입에 넣고 오래 씹었을 때 올라오는 은은한 단맛과 같다. 그래서 거부감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우리 술이 조금만 덜 달았으면 좋겠다. 일단 맛있는 술을 좀 더 양껏 먹고 싶은 소박한 술꾼의 바람이다.

식사 내내 음식과의 어울림을 즐기며 함께 마시는 술로는 와인이 대표적일 것이다. 불어로 ‘결혼’을 뜻하는 ‘마리아쥬(mariage)’는 와인과 음식의 궁합을 뜻하는 용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나부터도 까베르네 소비뇽을 필두로, 메를로, 피노누아 같은 붉은 포도와 샤도네이, 소비뇽 블랑, 피노그리 같은 청포도 품종으로 만든 술이 각각 어떤 음식과 어울리는지 기억하려고 애를 쓰는 편이다. 대체로 이런 와인들은 그다지 달지 않다.

단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와인은 만찬 자리의 주역을 차지하지 못한다. 식사의 맨 끝자리에서 후식과 함께 순서를 기다릴 뿐이다.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첫 모금에 ‘맛있다’고 느끼는 아이스 와인이 디저트 와인의 대명사인 이유다.

단맛은 우리가 유인원 시절부터 찾아 헤매던 맛이다. 잘 익은 과일의 맛이고, 우리를 살아가게 해주는 에너지의 맛이다. 우리가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가 없는 대상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식사의 순서에서, 단맛은 맨 마지막에 몰려 있다.

강한 단맛이 느껴지면, 우리의 뇌는 이제 충분한 영양을 섭취했다고 해석해 식사를 그만해도 좋을 때라는 신호를 보낸다. 식욕이 사그라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식사를 마감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집중적으로 단 것을 먹어 식욕의 불을 꺼뜨리고 입안을 개운하게 정리한다.

그런 맥락에서, 단 술의 순서는 식사 맨 끝이 자연스럽다. 그만큼 단맛은 우리를 단번에 매혹시키는 맛이면서, 우리의 미각을 쉽게 지치게 만드는 맛이기도 하다. 밤이 새도록 긴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술자리의 동반자로 아이스 와인을 골랐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자리일수록 심플하면서도 여운이 오래 남는 술이 환영받는다. 식사 내내 다채로운 음식들의 맛을 뒷받침해 주면서 길고 은근한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는, 단맛을 적절히 억제한 대신 탄탄한 캐릭터를 구축한 술이 제격이다.

이단평행봉에서 공중으로 도약하는 체조선수를 지상에서 서포트하는 코치가 가져야 할 덕목이 화려한 옷차림이 아닌 탄탄한 이두박근과 기립근의 힘인 것과 같은 이치다. ‘술 그리다’는 달달한 여운을 남기는 술이다. 하지만 그 단맛은 적절한 쓴맛에 의해 중심이 잡힌, 튀어 오르지 않는 단맛이다.

엿이나 사탕의 맛이 아닌, 다크초콜릿의 맛이다. 뭔가 취재 내내 부탁드리고 다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문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해결된 것 같아서, 살짝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사실 이 술이 우리의 원형과도 같은 술이에요. 8도짜리를 만들기 전에 이것부터 출시했었거든요.”

“아까 마셔본 것에선 과일의 향이 느껴졌다면, 여기서는 견과류의 향이 올라오네요. 확실히 도수가 올라가니까 펀치감도 있고… 걸리는 것 없이 깔끔하고 부드러운 것은 ‘택이’와 마찬가지인데, 마지막에 살짝 감도는 쓴맛 섞인 단맛이 초콜릿 같아서 매력적인데요.

이 술이라면 식사 내내 반주로 즐길 수 있겠어요. 여러 가지 마리아주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여기서 매력을 느끼셨다면, 이건 꼭 드셔 보셔야 해요. 전통적인 오양주 방식을 적용한 ‘천비향 생주’입니다. 14도입니다.”

미생물이 당분을 먹이로 알코올을 생산해 내는 과정을 양조라고 한다면, 다른 나라의 술은 미생물이 배를 채울 수 있는 초원(당분을 함유한 액체)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효모균을 풀어놓은 후에는 그 과정이 끝나길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통 방식은 조금 다르다.

한 번의 발효가 끝나기 전에, 술독 안에 미생물과 곡물을 더 넣어준다. 초원에서 양 떼가 열심히 풀을 뜯는 사이, 다른 초원에서 키운 풀과 양 떼를 합사시켜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과정을 ‘덧술’이라고 하는데, 한 번 덧술하면 이양주, 두 번 하면 삼양주, 네 번을 반복하면 오양주(五釀酒)가 된다. 덧술을 거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일단은 미생물의 먹이활동(알코올 발효) 기간을 연장시켜 생산품(알코올)을 많이 얻을 수 있다.

즉, 도수가 높아진다. 그리고, 미생물이 활발히 활동하는 술은 상하지 않는다. 즉, 술의 숙성기간을 길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긴 숙성기간을 거친 술은 당연히 풍미가 좋아지고 맛이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덧술이라는 과정은 술의 완성도에 있어서 커다란 도전이다.

술을 망치는 원인이 되는 외부의 잡균 등이 그 틈에 섞여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통제해야 하는 변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런 이유로, 오양주가 비록 문헌에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긴 했지만 상업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곳은 극소수다.

네 번 덧술한 천비향의 생주는 음전했다. 오랫동안 체화한 양질의 교육으로 인품까지 훌륭해진 부잣집의 장성한 아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품은 곡물의 향과 견뎌온 세월을 되바라지게 내세우지 않고, ‘아, 그 시간을 견디는 게 쉽지만은 않았죠. 하하.’라며 무심히 웃는 잘생긴 청년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런 청년같은 술들이 모여, 한국 술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 나에게, 김 부사장이 페트병에 담긴 술 한 잔을 더 따랐다.

“이건 아직 출시 전인데 맛이나 한 번 보세요.”

잔에 담긴 술에선 탁주의 새콤한 향이 풍겼는데, 색은 딸기 셰이크에 가까운 붉은빛이었다.

“여기엔 과일이 들어갔나요?”

“홍국(紅麴)이라고, 그 자체로 붉은빛이 나는 누룩을 쓴 거예요. 홍국균이라는 미생물로 누룩을 빚으면 그런 색이 됩니다.”

술은 위험했다. 10도가 넘는다는데, 도대체 어디에 알코올의 자취를 숨겨놓은 것인지 모를 정도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소거시켜 버릴 수 있는, 이 주변의 시공간을 변형시키는 일반상대성이론의 교보재와도 같은 술이었다.

“원래 저희 어머니가 술을 못 드시는데, 나이가 드시니까 불면도 생기시고 변비도 심해지셔서 만들기 시작한 거예요. 저희 집에서 만드는 술을 조금씩 블렌딩해서 만드는데, 이걸 드시고 나니까 어머니가 잠도 잘 주무시고 속도 편안해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알음알음 주변에만 소문이 나서, 비 오는 날에는 동네 분들이 모여서 술판이 벌어지곤 해요. 목장 하시는 분은 육회를 가져오고, 저희는 전을 굽고 이 술을 준비하고… 그러다 보면 페트병 한두 개는 금방이죠.”

이 말을 듣다 보니, 불현듯 ‘좋은 술이란 어떤 술인가?’에 대한 깨달음이 왔다. 이야기가 풍부하고 시대정신에 맞고 격이 있고 정성이 들어간 술….은 나중으로 돌리고, 당장은 ‘그 술을 마신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칠 듯한 부러움이 느껴지는 술’이 좋은 술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미칠 듯한 부러움’을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곧 그리 될 것으로 믿는다. 난 이제부터 전국의 좋은 술이란 술은 다 마시고 돌아다녀 볼 참이니까. 그렇게 당신을 부럽게 만들어서, 그곳에 가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어 볼 참이니까.

■ 탁재형 PD Columnist
탁재형 PD 칼럼니스트
직업 방송 작가
홈피 https://www.instagram.com/nomadpd/

탁재형 PD는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15년간 50개국을 취재하며, 세상의 넓음과 사람살이의 다양함을 카메라에 담왔다.

2002년 ‘KBS 월드넷’을 시작으로 ‘도전! 지구탐험대’, ‘세계테마기행’, ‘EBS 다큐 프라임-안데스’ 등 해외 관련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했으며 2013년부터 여행 부문 팟캐스트 부동의 1위인 ‘탁PD의 여행수다’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여행 산문집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김영사(2016), 세계 음주 기행기 『일은 핑계고 술 마시러 왔는데요?』시공사(2020)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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