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를 사용하던 복방 유복민과 먼저 터를 잡고 살던 원주민들과 서로 어울려 우리 민족의 원형인 맥족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고조선을 세웠다. 그 후 청동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청동기 문화 발전과 더불어 무문토기 시대가 전개되는데 이는 화북지방으로부터 농경문화가 들어와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올 알 수 있다.
벼농사는 기원전 4세기경 연나라의 교류로 인해 철제농기구를 수입, 제작하면서 농경문화를 더욱 발전시켰으며 경지 면적의 증대를 가져와 쌀의 수확량을 급격히 증가시켜 차츰 곡류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도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000년경 유적에서 반월형 돌칼이 출토되었는데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기구로 농업기술이 발달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농경문화가 발달하면서 부족국가시대는 안정된 생활을 하였고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게 되였으며 수확량에 대한 감사의 뜻에서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였다.
부여의 영고, 마한의 5월제와 10월제(풍년기원),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으로 농경에 대한 절대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늘과 백성이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고 욤식을 먹고 즐기는 공동식사 형태 위주의 식생활을 영위하었다.
이 시대의 곡류 조리법은 시루를 이용하여 찌는 형태였으며 술과 장류 등의 발효성 식품들이 개발되었고 어육류 맛을 좋게 하기 위해 암염과 과일 등으로 각기 짠맛, 신맛을 가미해 맛을 좋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족간의 교류와 중국, 일본과의 국제적인 교류도 있었다.
1) 보리농사의 전파
기원 전 1000여 년 전부터 보리와 밀의 야생종을 식용하다가 기원전 7000년경부터 맥류를 본격적으로 재배하였다. 맥류재배가 그리스,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래되고, 우리나라는 삼한시대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경기도 혼암리 유적 12호 주거지에 탄화미에 함께 보리가 출토되었다.
2) 채소와 과일류
단군신화에 쑥과 마늘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쑥 마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는 마를 재배하였으며 여러 가지 산나물과 밤, 배, 잣, 도토리, 머루, 산딸기 등이 식용되었다.
3) 양축과 수렵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부여는 양생(養生)을 잘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 부여의 벼슬이름에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拘加) 견가(犬加)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말, 소, 돼지, 개를 길렀음을 알수 있다.
4) 발효삭품의 가공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 “고구려 사람은 장양(贓釀)을 잘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양은 술빚기, 장담기, 채소절임과 갈은 발효식폼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
5) 맥적
맥은 맥족(貊族)을 가리키는 말이고 적은 꼬챙이에 고기를 꿰어 불에 구운 것이다. 진대(晉代)의「수신기(搜神記)」에는 “맥적이란 이민족(異民族)의 먹이인데도 태시(太始)이래로 중국 사람이 이것을 즐겨 귀인(貴人)이나 부실(富室)의 잔치에 반드시 내놓고 있으니 이것은 그들이 이 땅을 침범할 징조라 하겠다”고 기록하였다.
「예기(禮記)」에는 “꼬챙이에 꽂아서 불 위에서 굽는 것”이라고 기록하였고「의례(儀禮)」에는 “모든 적은 무장(無醬)”이라고 기록하였다. 즉 맥적이란 수렵으로 잡은 고기에 훈채((葷菜)와 술, 기름, 장으로 양념하며 재워두었다가 꼬챙이에 꿰어서 불 위에서 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시루에 찐 음식
시루에 찐 증숙요리(蒸熟料理)는 찐밤, 찐떡, 고기류의 찜, 어패류의 찜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