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정립되면시 4세기경에 왕권 중심의 국가 체제를 형성하였고, 상층 계급과 서민 계급의 이중 구조의 식생활을 형성함으로 상차림과 식기류의 계층화가 이루어 졌으며 쌀을 주식으로 하는 주, 부식이 확립되었다
중국으로부터 불교문화가 들어와 살생금지로 인해 육류 섭취에 대한 제한과 음다 풍습이 생기는 등 식생활이 변화되었다. 부엌 용구와 조리법도 발달하여 이전의 곡물조리법인 찌는 형태에서 직화의 원리로 가마솥을 이용하여 지금의 밥 짓기를 시작하였다.
콩을 가공하여 발효식품인 두장을 개발하여 단백질 보급원으로 이용하였다. 7세기에는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면서 고구려, 백제 문화를 수용, 융합하여 세련되고 다양한 문화와 식생활을 영위했다.
1) 곡물음식
찰밥, 오곡밥
삼국시대에 시루를 사용하여 찰밥을 쪄서 양념한 약밥이 있었고 후에 오곡밥으로 변하여 정월 보름날의 명절욤식이 되었다.
떡
「삼국유사」가락국기, 수로왕묘(首露王廟)의 제수로서 떡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으며「삼국유사」효소왕(孝昭王) 죽지랑조(竹旨郞條)는 화랑인 족지랑이 부하인 득오가 노역을 하고 있는 것을 위문하러 갈 때 술 한 병과 설병(舌餠) 한 합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 설병이 설기떡인지, 혀와 같이 넓적한 절편인지 확실치는 않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유리왕조는 “떡을 물어 잇자국을 시험한 즉 유리(儒理)의 잇자국이 많아 군신들이 유리들 받들어 왕으로 모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잇자국을 셀 수 있는 떡이라면 절편이나 인절미와 같은 친 떡이었을 것이며”「산국사기」백결(百結)선생조에는 “연말이 가까위지니 이웃에서 곡물을 찧는 방아소리가 들린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인절미나 가래떡을 찧는 떡방아 소리라고 볼 수 있다
과(菓)
『삼국유시」가락국기, 수로왕묘의 제수로서 과(菓)가 나은다. 과는 자연의 과일인데 과일이 없는 계절에는 곡분으로 과일의 형태를 만들고 과일나무가지를 꽂아서 제수로 삼았을 것이다.
감주
「삼국유사」가락국기, 수로왕묘의 제수로서 감주가 나온다. 감주는 쌀밥을 엿기름으로 삭혀 달게 만든 음청류이다. 이 감주는 오늘날까지 제물의 필수 기본품목의 하나다.
밥짓기
「삼국유사」에 효선(孝善)이 홀어머니블 보시고 살았는데 어머니가 스님에게 시주를 하고자 했으나 아무것도 없어서 집안의 솥을 시주했다고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솥이 주방의 기본용구이고, 쌀이 기본식폼이며, 밥 짓기가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발효식품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기록을 보면 신문왕 3년에 왕이 왕비를 맞이한 때의 폐백품목 중에 “米, 酒, 油, 醬, 醯, 脯가 130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술, 장, 시, 혜와 같은 발효식품을 폐백품목으로 보낸 기록을 볼 때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술
「태평어람」에 고구려 여인이 빚은 곡아주(曲阿酒)가 강소성(江苏省) 일대의 명주였다고 한다. 일본의「고사기(古事記)」에 “양주법올 아는 명인 인번(仁磻:일명 수수보리(須須保利))이 술을 빚어서 웅신(應身) 천황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본조월령(本朝月令)」6월보에 “웅신천황때 백제 사람 수수보리가 참래하여 조주(造酒)가 처음으로 시작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시인들이 읇은 시구(詩句)에 “한 잔 신라주(新羅酒)의 기운이 새벽바람에 쉽게 사라질 것이 두렵구나”라고 하였으니 당나라의 상류사회에서 신라주의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에 신라 무열왕의 하루 식량에 쌀 6말, 술 6말, 꿩 9마리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장과 시
장의 가공솜씨가 일본으로 전수되어 고려장(高麗醬)이라 하였으며「아언각비」에는 “장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시도 장의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으며「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시는 지금 말하는 전국장(戰國醬)이다. 전국장이란 하루 밤으로 만둘 수 있다.”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삼국사기」 김유신조에는 “장군이 급보를 받고 출전할 때 자기집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더니 50보쯤 지나다 말을 돌려 집안의 장수(漿水)를 가져오게 하여 맛을 보고 그 맛이 변함이 없다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혜
혜는 어패류, 수 . 조육류,채소의 절임을 총칭하는 것이다.
* 자료 : 이효지, 한국식 음식문화, 신광 출판사. 2004.
포(脯) : 생선, 조개, 고기 등을 말린 식품의 총칭
생선(조개, 고기)을 그대로 말리거나, 생선을 술에 담궜다 말리거나 생선을 소금에 절였다 말린 것 또는 생선을 술과 소금에 절였다 말린 것이다.
3) 차의 전래
차는 신라 27대 선덕왕대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차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을 42대 홍덕왕 3년(828)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가져온 차의 종자를 홍덕왕이 지리산 근교에 재배하도록 하여 차가 급속도로 보급되어 궁 안에서 차를 달이는 일을 담당하는 다방(茶房)율 둘 정도였다.
「삼국유사」에 “불아함(佛牙函)을 봉만하는 자리에 내시다방(內侍茶房)의 다방관원이 시중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보천(普川), 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할 때 아침마다 동굴에서 물을 길어 차를 달여서 문수불(文殊佛)께 공양을 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시대의 유적인 한송정반(寒松亭畔)에 화방이 차들 달이던 물아궁이와 다천(茶泉)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4) 주 . 부식 일상식의 정착
중농정책으로 곡물이 증산되고, 무쇠 솥의 보급으로 밥 짓기가 일반화되면서 밥이 아침, 저녁의 상용 주식으로 되었다. 반찬으로는 콩으로 담근 장, 고기나 어패류로 만든 포, 젓갈, 채소절임 등을 언제나 쓸 수 있도록 밑반찬으로 저장하였다. 이러한 상차림은 일상식으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