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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3. 서귀포 향토음식 구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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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애기낳고 바로 물질하러 갔던 시절이었다.

♣ 현춘능 (1935년생 / 남원읍 남원리) 구술조사

열세 살 때부터 물질을 했다. 물옷도 없어서 아버지 속옷이나 어머니 갈적삼 헌 것 입으면서 물질을 시작했다. 열다섯살이 되니까 태왁을 만들어 주더라. 처음 잡았던 고기가 객주리(쥐치)였다. 스스로가 얼마나 대견했던지. 그것이 물질의 시작이었고 평생의 업이 되었다.

어머니와 언니는 물질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물질이 좋더라. 바닷속에 들어가면 미역, 고기 등을 잡는게 참 신이 났다. 지금 생각나는 요리는 자리회이다. 특별한 양념 없이 된장, 풋고추, 식초, 제피를 조금 넣으면 맛이 있었다.

자리가 들어오는 철이면 자리사러 공천포까지 걸어서 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사러 오기 때문에 한사람에게 한 되 씩만 팔아주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한사람 몫이라도 더 사려고 꼭 나를 데리고 갔다. 그렇게 사온 자리는 일년동안 반찬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요즘 김장만큼이나 자리젓 담그기는 큰일이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항아리도 장담그는 항아리, 자리젓 담그는 항아리를 구분해서 사용했다. 자리젓을 맛있게 담그는 비법은 따로 있지는 않았지만 자리와 소금을 섞은 후 항아리에 담고 그 위를 헝겊으로 덮는다.

그다음 그 위에 다시 호박잎을 덮고 그리고 나서 토란잎을 덮고, 그 위에 바구니를 덮어 놓으면 자리젓이 맛있게 삭았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잎을 사용했다.

외국 대학생 해녀 체험
▲ 외국 대학생 해녀 체험

나는 물질(해녀)이 정말 좋았다. 미역 허치(채취) 하는 날에 애기를 낳았는데 애기를 오전 10시에 낳고 오후에 미역을 하고 싶은 욕심에 시어머니 몰래 미역 채취를 하러 갔다가 들켜서 혼이 났다. 젊을 때는 아픈 줄 몰랐는데 지금은 몸이 많이 안좋다.

그때는 미역이 감귤보다 더 돈이 되었다. 그래서 한푼이라도 벌려면 어쩔 수 없었다. 미역을 하루종일 채취해가지고 오면 그날 다 말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 상해버린다. 그래서 밤 늦게까지 말리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미역을 손질해 놓으면 미역장수들이 동네마다 미역을 사러 다녔다.

나의 원래 고향은 한남리였다. 그러나 4·3사건 때 바닷가 마을로 내려왔다. 보리작업 해놓고 바다에 가는 게 좋아서 보리작업도 진짜 열심히 했다. 스물한살 때 육지로 물질을 가보니 거기는 방앗간이 있어서 보리쌀이 하얗더라.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육지보리를 사가지고 제주에 돌아와보니 제주에도 방앗간이 생겼더라. 옛날에 밀가루가 없어서 보리쌀을 갈아서 밀가루 대신 먹었다. 보리쌀로 수제비를 해서 먹는 집은 양반집이었고 우리는 보리를 깎으면 나오는 등게가루를 먹었다.

고구마에 등게가루를 뿌려서 버무린 후 찌면 맛있는 음식이 되었다. 그것을 동네 사람들끼리 나눠서 먹었다. 그 때는 못살았어도 나눠먹는 정이 있었다. 그래서 등게가루 떡을 많이 해야 했다. 돼지고기를 먹으려면 추렴을 해야 했다. 그러면 숭고기(삼겹살), 뒷다리, 앞다리 등 추렴한 사람들끼리 나눴다.

맛있는 부위, 맛없는 부위가 따로 없다. 그냥 돼지고기만으로 만족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추렴해온 고기는 식구는 많고 고기는 적어서 구워먹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큰 솥에 국을 끓여 온 식구가 여러날 먹어야 했다. 돼지고기에 무 잎 넣고 메밀가루 풀어놔서 먹으면 맛있는 고깃국이 되었다.

* 자료조사 팀 : 김성은, 김미숙, 고경애, 고영란, 고금례, 김월자, 이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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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강원도농업기술원 •제주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귀포시향토음식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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