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익 (1957년생 / 서귀포시 호근동) 구술조사
호근리는 일제 강점기 때까지 논이 있었다. 그래서 좀 여유가 있었지 않나 싶다. 잔치때는 보리쌀을 삶아서 멍석에 널었다. 부드럽게 하기 위한 작업이었는데 그렇게 말린 보리쌀로 밥을 하면 밥이 정말 맛이 있었다. 잔칫집 부조는 보리쌀이나 좁쌀 등 집에 있는 것으로 형편에 맞게 했다.
그러면 답례로 밥한그릇, 고기 석점을 주었다. 그런 고기 꽂이를 ‘바육’이라 했는데 부잣집은 바육꽂이가 휘어질 정도로 크게, 없는집은 바육꽂이를 작게 해서 체면 치례만 할 정도로 만들었다. 옛날에는 큰일 나면 ‘계’가 조직되어서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물져다 주는 계’, ‘낭해오는 계’ 등이 있었다.
제삿날이나 영장(초상)때는 등절미라고 해서 멥쌀을 갈아다 반달모양으로 만들어 그것을 나눠주었다. 영장이 끝나면 수고했다고 피력(답례)으로 고기석점, 순대, 등절미 세 개정도를 주면 어른들은 그것을 먹지 않고 집에 가져와서 아이들에게 나줘주었다.
* 자료조사 팀 : 좌영희, 이도옥, 김화자, 강순옥, 원영순, 이월녕, 강애자
♣ 강애자(1950년생 / 서귀포시) 구술조사
식겟날은 돼지고기 적을 5점 또는 7점을 꽂았는데 돼지고기를 삶아서 몽클락(작고 도톰)하게 해서 꽂았다. 또 보리묵이나 밀묵(직접 재배)을 했다. 떡은 제편이라고 해서 흰 시루에 팥을 네 군데 정도 놔서 떡을 했다. 팥이 귀해서 조금씩 사용했다.
딸을 시집보내려면 이불을 세채 정도 해서 보냈는데 목화솜을 재배해서 솜을 딴 다음 물레를 돌려서 씨를 뺀 후 솜 이불을 직접 만들었다. 지금이야 솜 이불이 아닌 양털 이불이다 차렵이불이다 하지만 그 때는 딸이 있는 집은 면네(목화)를 심는 게 의무사항이었다.
* 자료조사 팀 : 좌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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