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홍자 (1941년생 / 남원읍 남원리) 구술조사
일곱 살 때까지 한남리에서 살았다. 4·3 때 동네가 모두 불타서 어쩔 수 없이 남원으로 내려와 살았다. 그 때 기억으로는 동네에서 좀 똑똑하다는 사람의 말을 많이 따랐던 것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군인들이 총 들고 온다는 소문을 듣고 산으로 가야 살 수 있다.
바다로 가면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산으로 도망가자. 그래서 산으로 모두 도망을 갔다. 뭘 알아가지고 갔겠는가, 그냥 살려고 숨었던 것이다. 그런데 멀리 숨어서 보니까 집이 모두 불타고 있더라. 다행히 우리집은 마을과 떨어진 곳에 있어서 불이 붙지 않았다.
그래서 동네 친척들이 우리 집에 모여서 며칠을 지내다가 남원리로 오게 되었다 일곱 살에 비친 4·3은 정말 끔찍했다. 남원리에 오니 차가 한대 오더니 모두 타라고 하더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한 차에 태워서 가더라. 서귀포시 어디쯤인가로 생각된다.
그래서 가보니 큰 운동장 같은 곳인데 건물이 있었고 바닷가 근처였다. 하도 사람이 많아서 창고 건물에 다 들어가지를 못하니 어린아이들은 나가서 놀라고 하더라. 우리는 철 없이 운동장도 뛰어다니고 바다에 가서 놀기도 하였다.
그런데 무슨 이상한 소리가 나길레 그쪽으로 가보니 사람을 거꾸로 묶어놓고 막 때리더라. 지금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을 나는 거기서 보았다. 그렇게 때리다가 주전자로 물을 코속으로 막 부어 넣더라. 그렇게 해서 기절하면 풀어줬는데, 기절한 사람 중에도 한쪽에는 의식이 있는 사람으로 한쪽은 죽은 사람으로 구분하더라.
죽은 사람은 바다에 가서 바로 버리더라.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끌려간 모든 남자들이 그렇게 맞았고 더러는 죽었고 그랬다. 먹을 것으로는 주먹밥을 하나씩 주는데 매를 맞은 사람들은 밥을 먹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가 밥을 씹어서 아버지 입에 넣어주면서 ‘견덤시라. 견덤시면 살아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여자와 아이들은 돌려보내고 남자들은 모두 육지 형무소로 끌려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한남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원에 살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 때 끌려가서 지금까지 생사를 모른다. 지금도 밤잠을 설칠 정도로 그 시절이 섬득하게 생각난다. 내 생각으로는 어릴 때 그렇게 힘들게 살았던 이유 중에 하나가 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특히 남원 쪽은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더 힘들었다.
열다섯살 이상 65세 이하 남자는 모두 잡혀갔다. 산으로 도망간 사람들의 가족 중에 제주시내로 공부하러 간 아들까지도 모두 잡아갔고 동네 리장이나 청년회장 등 리더격인 사람들의 집은 어린 아이까지 모두 잡아가서 죽였다. 그러니 일 할만한 사람은 없지 땅은 척박하지 정말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그 때 주식은 고구마였다. 한남리는 땅이 척박해서 고구마 농사도 잘 안되었다. 메밀정도나 되었고 그것도 수확량이 썩 좋지 않았다. 우리는 태흥리 고구마 밭에 이삭 주우러 다녔었다. 그렇게 주워온 고구마를 크게 쪼개어 물 넣고 삶다가 메밀가루 넣고 무좀 썰어놓고 범벅을 해서 먹었다.
무도 없어서 신례리까지 사러 다닌 기억이 있다. 지금 내가 생각나는 것은 보리쌀 방앗간에 가서 빻아온 것이다. 제사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리를 방애에 갈면 잘 안갈아 져서 까맣게 되는데 누가 얘기하더라. 서귀포에 가면 방앗간이 있는데 거기 가면 보리를 갈아서 쌀로 만들어 준다고.
그래서 어린나이에 보리를 짊어지고 서귀포 방앗간에 가지고 가서 보리쌀을 찧어왔다. 그 때 그 보리쌀이 얼마나 이쁘던지. 허영헌게(하얀게) 곤쌀(흰쌀)보다 더 좋더라.
그래서 그걸 가지고 와서 밥을 했더니 온 친척들이 ‘이런건 어디서 났냐고 이렇게 밥이 맛있는 보리쌀도 있냐면서’ 요망지다고(야무지다고) 칭찬을 엄청 들었다. 그 후로 사람들이 보리쌀을 방앗간에 가서 찧어다 먹기 시작했다. 스물두살에 시집을 가서 스물네살 때부터 제사를 맡아서 했다.
제사때 고기가 없으면 갈치도 절였다가 적으로 올렸다. 돼지고기는 추렴해서 구했고 소고기는 소금에 절였다가 물에 씻어서 적을 했다. 남의 집 제사에 갈 때는 가져갈게 없으니 갈치를 부조로 가져갔다. 갈치를 산디(밭벼) 짚으로 싹 긁어서 비닐을 벗긴 다음 산디짚에 계란 엮듯이 엮어 제삿집에 가지고 갔다.
제사 때는 좁쌀로 만든 떡 반, 쌀 떡 반, 또 좁쌀로 만든 떡을 꼬지에 꽂은 것을 ‘고달달’ 떡이라고 했는데 아이들은 좁쌀떡은 맛이 없어 안먹고 쌀 떡만 쏙쏙빼서 먼저 먹곤 했다. 잔칫날은 전날에 보리쌀 하고 팥을 삶아 멍석에 널었다.
그 다음 보리쌀하고 쌀을 조금씩 넣어 밥을 했다. 국은 돼지고기 삶은 물에다 무잎,을 넣고 끓였다. 잔칫날이라도 쌀밥을 못먹으니 새각시 밥을 먹으려 아이들은 진짜 전투하듯이 달려들었다. 그렇게 한 수저 얻어먹으면 그것이 그렇게 맛이 좋았다.
그리고 초상이 나면 좀 잘 산다는 집은 메밀로 국수를 했는데 메밀쌀을 국수 뽑는 기계로 뽑아가지고 와서 국수를 삶아 주면 ‘그 집 잘 차렸다’고 얘기했다. 산남지역이 지금 국수를 먹는 것은 아마도 분식 장려 때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할 때 남원읍은 무엇이든지 빨리 받아들였다. 아마도 읍사무소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한때는 잔칫 때 답례품을 주지 않는 운동이 있었다. 우리 큰아들 장가갈 때 (30년전) 답례품을 하지 말라고 해서 안했는데 그래도 친척들은 섭섭해서 조그만 거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읍사소에 고발해서 읍사무소 직원이 검사를 나왔더라. 그 정도로 답례품에 대한 단속을 했었다. 내가 어릴 때, 한 열 살때쯤이었던 것 같다. 동네 어려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집에서 무릇을 캐다가 삶더라.
무릇은 보리 수확하고 나면 밭에 뾰족뾰족 나오는데 패마농(잔파) 뿌리 같이 생긴 것이다. 그것을 주워다 깨끗하게 씻은 다음 바닷가에 가서 패(너패)라는 해초를 해 가지고 와서 함께 항아리에 담은 후 땅을 판다.
그리고 그것을 놓고 항아리 옆으로 보리타작하고 남은 가스락(보릿짚 보다 잔 땔감)을 놓고 그위에 흙을 덮고 다시 보리 가스락 놓고 흙 놓고 하면서 항아리 위에까지 덮는다. 그리고 나서 밑에다 불을 지피는데 여러 날 뜸들이듯 지피고나면 무릇이 익는다.
그러면 그것을 꺼내어 보리개역 (미숫가루)에 섞어서 먹었다. 무릇이 패와 함께 익어 까맣게 되어야 익은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 무릇이 먹고 싶어 그집에 자꾸 찾아가서 ‘뭇 안되수과, 뭇 안되수과’하고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무릇 장만하는 것이 시간이 걸려서 자주 해먹을 수가 없었다. 일년에 한 두번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릇이 밭에서 나와 햇빛을 맞아버리면 퍼렇게 되어 먹을 수가 없게된다. 지금처럼 저장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 시기를 놓치면 먹을 수 없었다.
우리 보다 어른들은 더 어렵게 살았을 것이다. 우리시대도 아버지 들, 즉 남자어른들 만 있어도 그렇게 어렵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힘들게 산 삶이지만 그래도 그런 삶이 있어서 지금 이렇게 잘 사는 삶도 있지 않은가 싶다.
* 자료조사 팀 : 김성은, 김미숙, 고경애, 고영란, 고금례, 김월자, 이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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