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화자 (1941년생 / 서귀포시 하원동) 구술조사
스무 두 살에 회수로 시집을 왔다. 그때는 모두 힘든시절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특히, 쌀이 귀한 지역이라 쌀밥은 정말 제사때나 먹을 수 있었다. 또, 제사 때라고 많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온동네 사람이 거의 괸당(친척)이니 그 날은 모든 사람에게 반(몫)이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한수저 정도, 거기서 더하면 반 그릇 정도를 먹으면 족하던 시절이었다. 정월명절은 그나마 메밀이 있어 빙떡을 해서 올렸고, 추석명절은 ‘보리묵’을 해서 떡 대신 올렸다.
보리묵은 보리쌀을 갈아다가 반죽을 되직하게 한 후 도톰하게 만들어 지져내야 하는데 후라이팬도 없고 식용유도 흔치 않은 시절이라 솥두껑을 뒤집어놓고 돼지 기름을 두른 후 지져냈다. 그 것을 떡대신 올렸다. 메밀묵을 먹을 수 있는 것도 호강이었던 시절이었다.
적은 돼지고기 적을 해서 올렸는데 고기가 귀하여 크게 할 수가 없어서 한꼬지에 넉점정도를 꽂는데 크기는 아주 조그맣게 만들었다. 생선도 요즘은 시장에서 사다가 했지만 그 때는 바다에 가서 직접 잡아다 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사나 명절이 다가오면 한달 전부터 남자들은 제사용 고기를 낚으러 바당(바다)에 나가야 했다. 옥돔은 귀해서 구경도 못하고 우럭이나 볼락정도를 잡으면 그것으로 만족했었다.
제사상에 올리는 갱(탕)국은 보통 생선으로 하는데 생선이 없으면 자리젓에 물을 부은 후 무를 썰어 넣어 대신 하기도 했다. 제사상에 올리는 나물로 고사리는 정말 중요했다. 고사리는 제사상에 올리기도 했지만 꺾어다 팔아서 살림에 보태기도 했다.
고사리를 꺾으러 가려면 새벽에 일어나서 가야만 했다. 점심은 ‘메밀범벅 주먹밥’을 해서 싸가지고 갔는데 메밀는쟁이(메밀을 거피할 때 나오는 찌꺼기)와 감자를 섞어서 범벅을 한 후 그것을 조그맣게 만들어 광목천에 싸서 가지고 가서 그거 한덩이 먹고 하루 종일 고사리를 꺾었다.
그렇게 꺾은 고사리 한짐을 지고 내려오려면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지금이야 차가 있어서 쉽게 가지만 그 때는 지금 탐라대학교까지 걸어가야 해서 한시간이 넘게 소요되는 거리였다.
초상집에 갈 때는 부조로 빙떡을 해서 가거나 보리쌀로 만든 상외빵을 구덕에 넣어서 가져갔다. 구덕에 넣을 때도 양이 많지 않아서 어슷어슷 넣어 마치 많이 넣은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다.
* 자료조사 팀 : 정정화, 강수진, 양경생, 고명옥, 고춘애, 허지혜, 김민자, 오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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