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콜피온스도 나오미 캠벨도 “코리아진생, 원더풀!”
지난 8월 현금부족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이 체코 정부에 갚아야 할 빚을 현금 대신 인삼으로 갚겠다고 통보해 관심을 모았다. 외신에 따르면, 북한이 체코에 갚아야 할 부채 1,000만 달러 중 50만 달러를 그에 상응하는 인삼으로 갚겠다고 제안한 것. 50만 달러어치면 인삼 약 20t이다. 냉전시대에는 공산권 국가 간에 현물을 이용한 국제교역이 성행했다.
체코 정부는 북한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졌다. 체코는 북한으로 부터 한해에 인삼 1.4t 정도를 수입하는데, 20t이면 건강식품시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도 고려인삼을 중요한 천연 건강식품으로 애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 인삼은 귀중한 동양의 보물 ‘루이 14세’
인삼이 서양에 알려진 것은 16세기경. 1299년 출간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중국, 아시아, 중동의 풍물과 문화를 담고 있지만 인삼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양의 신비한 약초 인삼은 서양에 알려지지 않있다. 인삼이 유럽에 전파된 최초의 기륵은 1575년 러시아인 신부 마르친 마르치니우스가 중국에서 얻은 인삼을 ‘신비한 풀’로 서술 한데서 비롯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전해진 동양의 신비한 풀 인삼은 입소문을 타고 유럽 상류층에 전해졌다. 태국 왕국의 사신이 프랑스 루이 14세(재위 1613~1715년)에게 헌상 했다는 문헌으로 보건대, 인삼은 굉장히 귀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태양왕’ 이라는 별칭을 얻은 루이 14세는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든 전제군주로, 당시 동양에서도 앞다퉈 많은 선물을 보냈는데 그중 인삼은 ‘등양의 보물’ 로 인식됐다. 서양에 알려진 인삼이 중국을 경유해 중국의 귀한 약재로 전파됐다연, 고려인삼은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들이 본국에 보내는 정세 보고서를 통해 처음 알려 졌다.
일본에 파견돼 있던 동인도회사의 쿠커르 바커르 무역관장이 조선의 특산물로 “쌀, 구리, 인삼”을 꼽으면서 “조선 해안의 한모서리 유역에서 일본인들과 교역하고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는 조선 중기 부산에서 성행하던 일본 쓰시마 도주들과의 인삼 교역을 서술한 것으로보인다. 이후에도 간간히 서신이나 여행기 형태로유럽에 전해지던 인삼은 1711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 인삼은 정열적 창작의 원천 ‘루소’, ‘고리키’
이렇게 서양에 전해진 인삼은 대중화 되지 못했지만, 상류층 사이에선 동양의 보물로 인식돼 귀한 선물로 오갔다. 철학자이자 문필가인 루소(1716-1778년)와 관련된 인삼 에피소드는 당시 인삼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말해준다. 루소의 활동 시기는 선교사 자르투가 본국에 동양의 인삼을 알려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는 그 신비한 약초가 어느 정도 알려졌던 때이다.
루소의 제자이자 문인이던 베르나르댕 드생피에르는 1772년 블루본섬에서 가져온 커피 원두 한 포대를 루소에게 선물로 보냈다. 블루본산 커피는 그 당시 매우 귀한 선물이 었다. 고지식한 성격의 루소는 “제자에게 값비싼 선물을 받을수 없다” 며 그것을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생피에르는 루소에게 커피를 돌려줄 것이 아니라 “선생님도 저에게 선물을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라며 넘어가려고 했다. 그때 루소가 생피에르에게 보낸 답례품이 인삼 한뿌리였다. 세계적인 사상가 루소의 꼿꼿한 선비정신을 동양의 인삼이 지켜준 것이었다.
러시아의 문호 막심 고리키(1808-1936년)도 인삼 애용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리키와 절친했던 소설가 자마찐은 고리키가 서거한 직후 망명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그를 회고하는 회상기를 남겼다. 소련 당국에 위험분자로 지목된 자마찐은 1932년 고리키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는 등 그와 막역한 친분 관계를 유지 했다. 자마찐은 문학에 대한 고리키의 정열을 보고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던 일을 회상하며, 고리키와 인삼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
자마찐은 줄담배를 피우고 결핵을 앓고 있던 고리키가 하루에 몇시간 밖에 자지 않고도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고리키는 비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마찐을 지하식당으로 데려가 호리병 안에 든 인삼즙을 보여줬다고 한다. 고리키는 "나를 존경하는 어떤 사람이 만주에서 가져다준 인삼"이라고 설명했다.
♣ 서양에 고려인삼 가치 설파 ‘선교사 자르투’
중국 베이징에 파견돼 있던 프랑스인 선교사 자르투는 청나라 강희제의 명을 받고 지도 제작을 위해 조선을 답사했다. 자르투는 1709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역(달단 지역, 만주 지방)을 돌면서 지형 자료를 수집하던 중 처음으로 조선 산삼을 접하게 된다. 그 당시 산삼은 금에 버금갈 만큼 귀했는데 ‘발견하면 중국 황제에게 바쳐지는 진상품’ 이라는 설명을 들은바 있는 자르투는 1711년 4월 자신이 직접 그린 산삼 삽화와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본국에 보냈다.
우리는 조선에서 불과 40리 거리의 ‘칼가라’ 라는 달단 사람들이 살고 있는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 네 뿌리의 산삼을 산에서 캐 우리에게 가져 왔습니다. 중국에서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거의 모든 약에 산삼을 배합합니다. (중략) 제가 뿌리의 절반을 날것으로 먹은 뒤 한시간이 지나서 맥을 짚어 봤더니 맥박이 훨씬 강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식욕이 증진됐고, 전보다 훨씬 원기가 좋아졌습니다. 힘도 전에 없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호전증세가 휴식 때문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크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흘 뒤 저는 무척 지쳐서 말잔등에 앉아 있기도 어려울 정도 였습니다. 이를 눈치 첸 관원이 제게 산삼 한뿌리를 주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그 반을 먹었는데 한시간 뒤 피로가 말끔히 가셨습니다. 그 뒤로는 산삼을 자주 먹습니다. 언제나 같은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자르투는 이러한 내용과 산삼을 발견한 지역의 정확한 위도, 경도, 식생 환경을 전하면서 신비의 약초를 꼭 찾을 것을 요청했다. 이 편지는 영국 런던 왕립학회보에 실렸으며, 1716년 캐나다 인디언 마을에 머물던 프랑스인 선교사 라피코는 자르투의 편지를 접하고 인디언들과 인삼을 찾아 헤맸다.
인디언들은 3개월 후 몬트리올 근교에서 산삼을 찾아냈다. 이것이 아메리카 진생의 시원이 됐다. 지금도 북미 지역에서는 야생삼을 관리하고 있으며, 특히 캐나다 퀘벡과 미국 위스콘신 주에서 대규모로 인삼(화기삼)이 재배된다.
* 옥순종 교양으로 읽는 인삼이야기 저자 한국인삼공사 고객만족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