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재 권벌 종가에서는 임금께서 충재 권벌 내외에 내린 불천위 제사를 드린다. 이때 특별히 만드는 음식이 바로 편이다. 편은 본편과 웃기떡으로 이루어져 있다.
♣ 열두 빛깔이 하나로, 한 개의 우주
달실마을 초입 한과 체험장에 마을 할머니들이 모여 왁자지껄하다. 모두 충재 집안 며느리들로 오색 한과를 만들기 위해 날을 정해 만나는 것이다. 충재 불천위 제사로부터 유래했다는 오색 한과는 벌써 500년을 헤아리며 마을의 큰 자랑이 되었다.
충재 권벌 종가에서는 임금께서 충재 권벌 내외에 내린 불천위 제사를 드린다. 이때 특별히 만드는 음식이 바로 편이다. 편은 본편과 웃기떡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곳을 닮았다 하여 동곳떡으로 불리는 본편을 쌓고, 그 위에 웃기떡인 청절편, 밀비지, 송기송편, 경단, 쑥단자, 부편, 잡과편, 전, 산심, 조악, 깨구리 같은 편을 순서대로 한 켜씩 총 열한 켜를 쌓는다.
동곳떡 본편과 웃기떡은, 모두 12가지 편이 다른 모양 다른 색으로 만드는 한 개의 우주이며, 달실마을을 대표하는 제사음식이다.
♣ 열한 켜 웃기떡의 장엄, 편
목재로 만든 원형 편 틀에 본편을 시계방향으로 괸다. 이때 머리는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눌러주고, 꼬리는 가운데로 고정한다. 층이 홀수가 되도록 높이 쌓는데 예전에는, 할머니 제사 때는 23켜, 할아버지 제사 때는 25켜를 쌓았다고 한다. 그 위에 웃기떡의 종류를 1켜씩 총 11켜를 쌓는다.
▪ 오색 한과
치자, 검은깨, 자하초, 껍질 벗긴 깨, 검은깨로 곱게 물들인 오색 강정과 넓적하게 튀겨 만드는 산과, 약과가 있다. 오색 한과는 찹쌀로 손바닥만 한 떡살을 만들어 바싹 말린 후 기름에 넣어 튀긴다. 지진 유과에 갖가지 옷을 입혀 만든다
1. 부편
찹쌀 반죽에 볶은 콩가루와 물엿을 섞은 소를 넣고 그 위에 대추채를 얹은 후, 찜통에서 쪄낸 다음 고물에 묻힌 떡.
2. 조악
찹쌀 반죽을 둥글고 납작하게 빚어 볶은 콩가루와 물엿을 섞은 소를 넣고, 반으로 접어 가장자리를 눌러 조개 모양으로 만든 떡.
3. 쑥단자
쑥과 찹쌀 가루로 만든 떡을 끓는 물에 넣어 익힌 다음, 물엿을 바른 후 녹두 고물을 묻힌 떡.
4. 밀비지
콩가루에 물엿을 넣고 반죽한 소가 들어 있는 납작한 떡.
5. 청절편
쑥을 넣은 절편.
6. 경단
찹쌀 가루를 뜨거운 물에 익반죽하여 밤톨만 한크기로 빚은 후, 끓는 물에 삶아내어 콩고물을 묻힌 떡.
7. 잡과편
찹쌀 반죽을 밤톨만 한 크기로 빚은 후, 끓는 물에 삶아내어 대추채에 굴린 떡.
8. 산심
찹쌀 반죽을 납작하게 만든 후, 기름을 두른 팬 위에서 얇게 지진 떡.
9. 전
찹쌀 가루에 대추채를 곱게 갈아 반죽한 것을 납작하게 만든 후, 기름을 두른 팬 위에서 얇게 지진 떡.
10. 깨구리
찹쌀 반죽을 밤톨만 한 크기로 빚은 후, 끓는 물에 삶아내어 검은깨 가루를 묻힌 떡.
11. 동곳떡
달실마을에서는 잔절편이라고 부른다.
12. 송기송편
소나무의 속껍질인 송기를 넣어 만든 송편.
♣ 오색 한과 솜씨와 맵시의 중심 손숙 종부
고(故) 손숙 종부는 권종목(72세) 종손과 함께 마을의 구심이었다. 손숙 종부의 오색 한과 만드는 맵시와 솜씨는 근동에 자자했다고 한다. 손숙 종부는 “우리 집 오색 강정은 아무나 흉내 못 내요”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지금은 차종부가 시어머니의 솜씨를 잇고 있다.
종부의 손맛을 잘 이어, 마을의 부녀회에서는 한과와 강정을 달실마을을 대표하는 사업으로까지 단단하게 자리매김하였다. 차종손 권용철 씨는 바쁘다. 가문에서 설립한 박물관을 헐고, 국가 지원사업으로 새로 지어,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대구한의대와 안동대 대학원에서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대학의 교직원으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독립기념관에서 경험도 쌓았다. 그 이력을 바탕으로 충재박물관 신축과 관리를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듬직한 체격에 독립기념관에서 배우고 익힌 수려한 말솜씨를 더하여, 지나치듯 들른 관광객들을 웃겼다 울렸다 한다. 그는 요즘 마을 어른들과 함께 유교문화체험마을을 천천히 진행하고 있다.
♣ 달실마을, 안동 권씨 집성촌
한산 이씨는 대학자를 여럿 배출한 가문이다. 중시조인 이곡(李穀)은 고려의 문장가이자 경학의 대가였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원나라의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고려의 고위관직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이 바로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이름 높은 고려 말의 석학 이색(李穡)이다.
인재공(麟齋公) 이종학(李種學)은 이색의 둘째 아들이다. 14세의 나이로 성균시에 합격한 수재였으며 왕명을 출납하는 중책을 맡았고 고려시대 과거의 고시관을 겸하였다.
그는 아버지 이색과 함께 왕권교체의 시기에 명리를 따르지 않고 죽임을 당하는 순간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켰다. 그는‘신물응거(신勿應擧)’곧‘신중히 과거시험에 응하도록 하라’며 사실상 과거에 응하지 말라는 유훈을 아들 이숙야(李叔野)에게 남겼다.
빼어난 인재였던 숙야는 아버지 인재공의 유언에 따라 벼슬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권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 초, 고려 유신을 대상으로 한 융화책에 의해 부득이 고을의 목사를 맡았다. 한산 이씨가 모여 사는 은지동은 600여 년 간 전란의 피해를 입은 적이 없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에도 마을에 변고가 없었고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이세준 종손은‘피난 가면서 항아리에 담아서 마을 뒷산에 묻어둔 신주도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충신의 일편단심이 담긴 은지연못의 음덕이 마을을 지켜준 것이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