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너머로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그 뒤편 푸른 바다가 하얀 포말의 파도를 끊임없이 육지로 밀어냈다. 햇볕에 따뜻하게 달궈진 모래는 때 이른 피서를 떠나온 사람들 차지였다.
하늘과 바다 경계를 구분 지을 수 없는 파아란 지평선을 배경으로 하얀 옷차림의 소녀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뛰놀았다. 부산은 그렇게 서울에서 400km를 달려온 외지인을 반갑게 맞았다.
인구 340만 명의 부산은 수도 서울에 이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다. 바다와 육지, 어촌과 빌딩들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졌다.
해운대와 광안리에는 70~80층짜리 마천루 건물들이 위용을 뽐냈다. 건물 주변 선착장에선 하얀 요트들이 선주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었고, 바다 위에 솟은 길이 7.4km 광안대교가 휘돌며 도시 경관을 절경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열정이 넘치는 도시예요.”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금수복국의 안창규 지배인은 부산의 매력을 이같이 말했다. “도시 곳곳이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로 가득합니다. 여름과 겨울, 밤과 낮 구분 없이 사람들이 부산을 찾아와 즐겨요. 금수복국이 24시간 잠들지 않고 운영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3시였건만 매장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테이블마다 복국과 맛깔난 반찬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더운 여름에도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요리는 복국입니다. 복어는 계절을 타지 않아요. 항상 힘을 북돋워 주거든요.”
회부터 복국까지 다양한 복 요리를 맛볼 기회를 벼려온 참이었다.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복사시미. 얇게 뜬 회에 금가루를 뿌리고, 한 점 한 점 점묘법으로 접시에 얹은 뒤, 말린 지느러미로 장식하자 날개를 펼친 한 마리 학이 완성됐다.
한 젓가락 먹어보니 비린내 없이 담백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입속을 희롱했다. “복어를 8~12시간 정도 저온 숙성시키면 쫄깃한 식감과 함께 감칠맛이 난다”라고 지배인이 귀띔했다. 복사시미를 측면 지원해주는 소스도 취향 저격.
직접 끓인 유자(폰즈) 소스와 간 무를 금수복국에서 직접 담근 간장에 넣었다. 무는 두 종류였다. 무를 강판에 간 ‘다이콘 오로시’와 무에 구멍을 낸 뒤 붉은 고추를 끼워 강판에 간 ‘모미지 오로시’. 하얀색 붉은색 무와 검은색 간장에 실파와 레몬까지 곁들이니 작은 종지에 형형색색 이야기가 많이도 담겼다.
회에 실파를 얹은 뒤 돌돌 말아 소스에 찍어 먹는 것이 단골들의 정석. “소스는 열흘 정도 숙성시킵니다. 그래야 맛이 제대로 우러나죠.” 기운 드센 복사시미의 파트너가 되려면 소스에도 이 정도 정성이 들어가야 하나보다.
복사시미에 이어 복 튀김과 껍질 무침, 복육회가 함께 상에 올랐다. ‘복 요리 어벤저스’를 구성하면 이런 모습 일까. 찬물을 좋아하는 복은 살도 탱글탱글하다. 때문에 사시미도 육회도 얇아야 쫄깃한 식감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올해 처음 금수복국에서 개발한 육회는 복을 가늘게 썬 뒤 특제 소스로 버무렸다. 소스 제조법은 비밀. 육회와 같은 접시에 담겨 있는 채소는 핑크볼(적무순)이다.
쌉싸래한 맛이 입속에서 복육회와 일합을 겨룬다. 맛의 재미를 원한다면 김에 싸서 흑임자 소스에 찍어 먹으면 된다. 겉보기엔 마냥 고소한 흑임자지만 막상 입에 넣으면 잠복해 있던 고추냉이 군단이 입속을 점령한다. 반전 매력의 흑임자 소스가 복육회 맛의 결정구인 셈이다.
바로 옆 접시에선 껍질 무침이 매콤한 향을 솔솔 흘려보내고 있었다. 콜라겐 덩어리인 껍질무침은 피부 관리에 신경 쓰는 여성 식객들에게 인기 만점, 주당들에겐 술안주로 인기 천만 점이다. 오이, 양파, 당근, 적양배추와 복껍질을 초고추장 양념으로 빨갛게 버무렸다.
역시나 특제 양념의 제조법은 가문의 비밀. 금수복국 내 복 전문가인 김근욱 부장은 “껍질에 있는 잔가시를 칼로 하나하나 제거한 뒤 살짝 삶아서 말린다”라고 설명했다.
껍질과 오이, 양파, 당근을 한 젓가락 집어 든 뒤 숟가락에 얹었다. 한입 가득 넣자 매콤한 초고추장 옷을 입은 식재료들이 입안에서 마음껏 뛰놀며 어울렸다. 특히나 껍질은 젤리처럼 탱글탱글한 식감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씹어보니 껍질도 두 종류로 나뉜다.
어두운 색깔의 등 부분은 쫄깃함이 강한 반면, 하얀 배 부분은 몰캉몰캉 부드럽게 씹힌다. “껍질 무침을 만들 때는 밀복을 씁니다. 까치복은 거칠어서 무침으로 쓸 수 없어요.”
두런두런 복 이야기로 꽃을 피우면서 복 튀김으로 젓가락을 옮겼다. 마리네이드로 절인 참복에 전분을 입혀 튀긴 뒤 카레 가루로 마무리했다. 녹차소금과 간장소스가 한 팀으로 다녀 취향 따라 선택할 수 있었다. 한입 씹어보니 닭튀김이 떠올랐다. 블라인드 테스트였다면 구분하기 힘들었을 정도.
여기에 식당에서 직접 만든 모주를 곁들이니 금상첨화. 17가지 한약재를 넣은 모주는 알코올 도수가 1.5% 정도인 ‘한약 막걸리’다. 쌍화차, 수정과 등 전통차의 향이 걸쭉하게 입안으로 밀려들어오니 순간 50년 된 주막에 앉아 있는 듯했다. 복튀김을 안주 삼아 한 잔 두 잔 걸치다 보니 어느새 한 동이를 다 비웠다.
손가락에 묻은 카레 가루를 쪽쪽 빨아먹는 사이 마지막 주자인 복국이 나왔다. 얇게 썬 무를 바닥에 깐 뒤 콩나물, 미나리, 팽이버섯, 대파, 복어 등을 얹고 육수를 넣어 팔팔 끓였다. 국물을 한 술 뜨자 뜨끈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가슴과 배로 퍼져나갔다.
속이 일거에 정리되면서 ‘하’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무 특유의 시원한 풍미가 복과 잘 어울렸다.
해운대에서 복국이 안방마님이라면 부산 북부의 기장군에선 곰장어가 대장이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차로 20여 분을 달려가면 송정해수욕장을 지나 공수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은 곰장어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곰장어 집성촌’으로 불린다.
이 중 원조짚불기장곰장어외가집을 찾았다. 마침 정문 바로 옆 아궁이에서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태용 사장이 곰장어 예닐곱 마리를 산 채로 그릴에 올려놓고 마른 짚불에 불을 붙였다.
사람 키보다 높이 타오른 불길이 섭씨 700도의 열기로 곰장어를 덮치자 소가죽보다 질기다던 껍질이 타버리면서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이 사장이 마른 짚불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짚불 향이 곰장어의 비린내를 잡아주고 불 맛도 내줍니다. 또 이렇게 익혀야 육즙의 풍미를 더 느낄 수 있죠.” 화끈한 ‘불 쇼’를 감상한 뒤 한옥 식당으로 들어갔다.
짚불 곰장어와 양념곰장어를 주문하니 짚불부터 먹는 게 순서란다. 노릇노릇 속살을 드러낸 곰장어가 돌판 가득 담겨 나왔다. 오독오독 씹히는 소리와 고소한 짚불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굵은소금이 담긴 기름장에 찍어 먹으면 더욱 맛깔난다.
내친김에 곰장어와 생마늘, 집 된장, 청양고추로 만든 고추지를 깻잎과 상추에 푸짐하게 얹어 쌈을 쌌다. 입속에 밀어 넣고 두어 번 씹자 곰장어의 고소한 육즙이 강한 식재료들 틈을 비집고 다녔다. ‘아, 이거다’ 무릎을 탁 쳤다.
짚불 곰장어를 와구와구 쌈 싸 먹는 동안 석탄 옆 가스버너에선 양념 옷을 입은 곰장어가 익어갔다. ‘사장님만 아는 비밀’이 담긴 빨간 양념을 껍질을 벗긴 곰장어와 양파, 대파 위에 고루 덮었다. “양념이 곰장어에 깊이 배야 해요. 언제까지 익혀야 하나고요? 양파가 익을 때까지 볶아주면 됩니다.”
푹 익은 양파와 함께 양념곰장어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양념은 좀 달다. 오삼불고기 느낌이다. 맵지 않고 단어 그대로 ‘매콤’하다. 양파의 단맛도 영향을 준 듯하다. 빠알간 양념 옷을 입었는데도 짚불보다 비린 향이 더 느껴지는 게 흥미로웠다. 이래서 짚불로 굽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일까.
곰장어 잔치가 파하자,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갔다. 붉은 하늘은 바다에도 주황색 물감을 풀었고, 이내 검게 변한 물결이 달빛을 받아 조명 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렸다. 밤이 내려앉았지만 부산은 잠들 줄 몰랐다. 또 다른 부산이 깨어나 밤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부산역에서 지하철로 여섯 정거장을 지나 서면역에서 내리니 목청껏 부르는 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젊은이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왁자지껄 떠드는 서면은 서울의 홍대, 이태원과 닮은 면이 있다.
흥겨운 음악소리에 취해 10여 분간 걷다가 멈춘 곳은 ‘초이참치’. 최씨 성을 가진 셰프가 운영하는 오너셰프 스시 레스토랑이다.
나무로 둘러싸인 40㎡(12평)의 공간이 작은 바닷가 오두막집을 연상시켰다. 바 형태의 테이블 너머로 최병준 셰프의 능숙한 칼놀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300kg 짜리 참치가 들어온 게 있어요. 아주 좋은 놈입니다.” 최 셰프의 서글서글한 미소에서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 식재료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참치 다랑어 뱃살’ 메뉴를 주문하니 가장 먼저 연어샐러드가 등장했다. 주황빛 연어와 초록 어린잎 채소의 색상대비부터 맛깔스러웠다. 함께 나온 곰탕은 초반 분위기를 압도했다. 참치뼈를 넣고 푹 끓인 뒤 파와 후추를 넣어 비린 맛을 완벽하게 잡았다.
별다른 설명 없이 먹었으면 일반 곰탕인 줄 알았으리라. 곰탕이 생각나 초이참치를 찾는 단골들도 있다고. 곰탕은 참치회를 맞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드디어 참치회 등장. 검은 접시 위에 놓인 20여점의 선홍빛 회가 젓가락질을 재촉했다. 주연배우는 대뱃살, 깍둑썰기 한 중간뱃살과 얇게 뜬 배꼽살이 조연 역할을 맡았다.
대뱃살에 고추냉이를 얹은 뒤 꽃무늬가 그려진 간장 종지에 살짝 찍어 맛봤다. 사르르. 고소하고도 기름진 뱃살이 봄날 눈 녹듯 혀를 타고 흐드러졌다. 중간뱃살은 칼집을 촘촘하게 내 식감을 조절했다. 쫀득쫀득 씹는 맛이 일품이었다.
최 셰프에게 물었다. 참치회는 좋은 횟감을 확보하는 것이 처음이자 끝 아니냐고. 셰프는 망설임 없이 아니라고 답했다. “능력 있는 셰프는 참치회 맛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세 가지 방법을 알려줬다. 해동과 숙성, 그리고 ‘칼 맛’이란다.
얼어 있는 회를 어떻게 녹이는지, 그리고 이놈을 어떻게 숙성시키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가 터득한 혼자만의 노하우는 역시나 공개 거부. 칼 맛이란 참치살의 결대로 날이 들어가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셰프가 참치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
초등학교 때 특별활동으로 조리부에 들어갈 정도로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칼 한 자루를 쥐고 한국, 스페인, 프랑스, 일본을 거친 뒤 다시 한국에서 자신의 성을 내건 참치횟집을 열었다. 참치는 그와 오대양 육대주를 함께 누빈 죽마고우다.
뱃살을 연신 입에 넣고 배꼽살로 마무리할 때 즈음 초밥 네 점이 다소곳하게 앉은 접시가 올라왔다. 이번엔 불 맛을 머금은 연어와 새우도 함께였다.
“손으로 먹어야 제맛이 난다”라는 셰프의 조언에 따라 한 점 한 점 조심스레 집어먹었다. 탱글탱글한 밥알들 사이로 기름진 뱃살이 스며들면서 함께 토독토독 터졌다. 연어와 새우의 불 맛은 뱃살의 느끼함을 정돈하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다음날, 약간의 숙취 기운과 함께 부산역 바로 앞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웅장하고 붉은 중화문을 지나니 부산 속 작은 중국이 펼쳐졌다. 곧장 영화 ‘올드보이’에 등장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만두를 빚은 ‘장성향’으로 향했다.
주연 배우 최민식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15년간 씹어 먹던 그 ‘눈물의 만두’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2004년 5월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올해 5월,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이 칸 영화제 최고 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역사적인 순간인 만큼 만두를 반드시 먹어야 할 이유도 생겼다.
주문한 만두가 등장하자 크기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일반적인 군만두의 2.5배 크기, 성인 남성의 손바닥만 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입을 있는 힘껏 벌려 한입 베어 물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 요즘 유행하는 ‘겉바속촉’의 모범사례라 할 만했다.
중식당 군만두는 피가 두꺼운 편인데, 이 집 만두는 유독 두툼했다. 만두소에는 양배추와 숙주, 파, 다진 고기 등이 알차게도 들어갔다. 인위적인 기름이 아닌 식재료에서 샘솟은 육즙이 입안을 가득 적셨다. 간장을 찍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간도 잘 맞았다. 맥주와 찰떡궁합.
만두 한 접시에 5개. 만두를 모두 해치우는 데 실패했다. 주인장은 당연하다는 듯 남은 만두를 포장해줬다. 만두 가격은 5개 7000원, 7개 9000원. 맛도 가격도 매력적이다. 만두가 담긴 검은 비닐봉투를 흔들며 차이나타운을 나섰다.
한낮의 태양이 부산의 열기를 조금씩 덥히자 이에 질세라 곳곳에 포진한 그늘이 선선한 바람을 실어 보냈다. 맞은편 부산역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니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 다다랐다.
바다 저편에서 초호화 크루즈선이 부산 갈매기들의 마중 속에 다가오고 있었다. 부산과의 조우를 앞둔 승객들이 갑판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부산항대교 아래를 통과한 크루즈선이 힘찬 뱃고동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夏)신가,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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