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기른 농작물 스스로 조리한 음식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초기에는 왕실과 부유층이 사원경제를 지원해주었다. 국가 차원에서 사찰을 만들고 왕실과 귀족들이 거대한 토지와 재물을 기증함으로써 불교는 탁발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출발한 선종(禪宗)은 이런 관습을 거부했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백장회해(720~814)이다. 마조도일의 수제자인 백장은 선종사찰의 생활윤리인 청규를 지어 공동노동을 의무화하고 사찰토지의 경작에 솔선수범 했다. 그가 정한 노동의 원칙은 지금 북방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남았다.
울력이라고 하는 공동노동이 그것이다. 사원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누구도 매일 매일의 예불과 수행, 울력을 거부할 수 없다. 백장회해는 나이 90이 넘어서도 자신이 정한 노동 원칙에 충실했다. 아침마다 쟁기나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갔다.
90이 넘은 노인이 밭일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걱정이 가득했다. 그만 하라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 결국 제자들은 호미와 쟁기를 감추어버렸다. 여느 때처럼 일을 나가려던 백장은 연장이 보이지 않자 곧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리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제자들은 스승과의 고집싸움에서 자신들이 이긴 것으로 알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스승은 식사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하지 않았으므로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는 말이 여기에서 생겼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잘못을 빌고 다시 연장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찰에 기증된 토지에서 스스로 작물을 재배하여 조리해 먹는 선불교는 검박한 생활태도와 노동윤리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때로 어려운 박해시기를 만나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노동하여 거둔 수확물로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는 선종 특유의 사찰음식이 발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