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명식
1940년생, 황해도 연백군
1954년 냉정리 정착
냉정리 노인회 회장이시자 이북오도민 회장이신 주명식 할아버님은 황해도 연백군 출신으로, 1.4 후퇴 이후 보위군을 피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나와 현재 포천시 관인면 냉정리에 살고 계신다.
주명식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정착지 냉정리, 그리고 고향 청계리 냉정리는 54년도 4월 달에 수복이 되었습니다. 그때 세대수가 많이 들어왔어요. 200여 세대가 들어와 살면서 가시는 분은 가시고 사시는 분은 살고 그렇게 살다 보니까 지금은 130호 정도 살고 있습니다.
우린 원래가 농사꾼이 됐으니까 농사를 지었는 데 여기 처음에 들어와선 뭐 농기구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 참 애로가 많았습니다. 차츰차츰 정부에서 농기구 보급도 해주고 소도 좀 주고 해서 아직까지 농사를 주-욱 지어 내려 왔습니다.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송봉면 청계리1)입니다. 우리 동네가 원래 살던 고향이 300호가 넘었어요. 동네 자체적으로 그 마을을 위해서 당산에 올라가서 산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어요.
동네 주민들이 전체가 다 모여서 큰 잔치를 하는 거지요. 아주 번화한 마을이었는데 거기서 초등학교 다니다가 6.25 사변을 만났죠. 초등학교 4학년에 사변이 나서 피란을 나왔습니다.
♣ 피란길에 오르며 가족과 헤어지다.
피난 나오면서 아버지하고 저희하고 헤어졌어요. 그때 당시 작은 아버지가 그 이북 보위부에 끌려갔어요. 그러니까 피난을 나와야 되는데 아버지가 하는 얘기가 “난 작은 아버지 때문에 어떻게 가느냐. 너희들이 먼저 나가라.
우린 급하면 나가마” 그랬는데 영 못나오고 그냥 헤어진거야…… 그러니까 아버지, 작은 아버지, 작은 엄마, 세 식구가, 세 명이 떨어진 거야 그냥. 그래서 헤어졌습니다. 사변 난 것도 몰랐어요 우린 처음에는. 보위부에서 전부 다 주민들을 이북으로 피난을 시켰어요.
거기에서 그러니까 ‘야 이거 조짐이 뭐야, 조짐이 좋질 않다 천상 남한으로 가야 되겠다’ 어른들이 그런 결심을 가지고 피란을 나왔죠. 연백군 봉선면까지 갔다가 그 다음날 밤에 이제 몰래들 다 도망 나온 거 에요.
♣ 보위군을 피해 섬으로, 여수로, 냉정리로,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한 피란길
1.4 후퇴 후에 나왔는데, 섬에 있는 지역 치안대 도움으로 섬으로 피난을 갔어요. 용매도라는 섬에 있었는데 수천 명이 섬에가 메였으니 먹을 물이 없었어요.
급하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거기 군수하고 타협을 해서 우리를 전라남도 여수시로 피란을 시킨 거야. 여수 와서 갑면, 읍면, 몇 세대, 몇 세대 배정을 해서 거기서 3년 동안 살았지.
그런데 여기가 가찹잖아2) 황해도로 가차운3) 데로 가자해서 이제 집단적으로 갔으니까 또 집단적으로 온 거지 열차를 타구서는. 그래 연천 전곡서 내려가지고, 전곡서 미군들 출구를 이용해서 이제 여기까지 들어왔죠.
♣ 군정 하의 냉정리에 정착하다.
처음에는 군정 시대니까 면장도 군인이었었고, 이장도 군인이었었고. 그래 이제 군인들 군정 하에 모든 제재를 받고 사는 거 에요. 군정 때는 이장이 군인이니까 잘못한 게 있으면은 그냥 사무소에 데려다가 막 때리고 막 그렇게 했다고요 첨에는.
처음에 들어오니까 집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미군들이 천막을 쳐 줘가지고 천막에서 사람이 열 집이고 열다섯 집이고 집단적으로 들어가서 사는 거 에요. 그렇게 생활하다가 미군들이 목재를 줘서 개인들이 집을 지었어요.
배정을 해 줘서 개인 별로 다 전부 다 집을 지었죠. 짓고선 따로 다 나가서 살기 시작 한 거죠. 민정이 되니까 그때는 뭐 동네 이제 마을에서 이장도 뽑고 반장들도 뽑고 해서 이제 조직이 되는 거죠 그때는.
♣ 고향의 초가지붕과 호박만두
우리 그 고향에 살 때는 옛날에는 전부 다 초가집이었었잖아요? 지붕에는 호박들을 많이 올렸어요 지붕에. 호박들을 심어서 지붕에다 올려서 이제 올라가서 따다 또 해먹고 만두도 해 먹고 호박김치도 해 먹고 뭐, 그 호박을 이용을 많이 했어요 그때 당시에.
그래서 우선적으로 생각나는 게 그거더라고. 고향에 있을 땐 호박 농사를 많이 지니까 음식을 많이 해먹었는데. 만두는 주로 겨울에 먹었는데, 겨울엔 꿩고기를 넣고, 여름엔 호박을 넣어 만 두를 빚었어요.
♣ 고향 땅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 풍경
(고향에) 가고 싶죠. 고향에서 어릴 적에 뛰어 놀던 그 생각. 같이 놀던 저 친구들 생각나죠. 그러니까 젊었을 땐 몰랐는데 자꾸 나이 먹으니까 생각나는 거야 지금은. 고향에서 이렇게 정말 그 같이 놀던 친구들, 그 풍경, 그런 게 자꾸 생각나는 거야 지금.
그 옛날에 친구들하고 같이 놀던 생각. 고기 잡으러, 새 잡으러, 뭐 농촌에서 그런 거 밖에 더 있어요 놀이 라는 게. 우리가 살던 연백군이 해변가에요. 선창에 나루터가 있는데 매일 나가는 거죠. 생선도 사고 고기하고 물건을 바꿔 오기도 하고. 어릴 때니까 애들 개울에 나가서 물 퍼서 선 낚시질, 망둥이 낚시를 많이 했죠 어릴 때.
♣ 통일이 되면 어른들 유해라도 찾아서 인사드리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혹시라도 요즘이 또 분위기가 좋기도 하니까. 뭐 살았다고는 지금은 믿지 못하고. 유골이라도 찾아서 뭐 어른들 공경하는 마음 그거죠. 저걸 가서 찾느냐 못 찾느냐 그게 문젠 데…… 찾을 수만 있다면 좋지요. 그래도 유해라도 찾아서 인사라도 드리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게. 그러나 이게 지금은 뭐 생각뿐이지,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