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4월 21일 정재원은 울산부사로 부임했다. 그가 울산에 머문 기간은 1년 6개월 남짓이다.67) 그는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이다. 1789년 과거에 급제한 뒤 승정원에서 일하던 정약용은 8월 승정원의 허락을 얻어 아버지를 찾아 울산으로 내려온다.
울산부사로 있던 아버지 곁에서 추석을 지내기 위해서였다. 이 영향이었는지 그는 울산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남긴다. 그가 울산에 머문 기간은 짧았지만 울산 음식의 장점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 중 눈에 띄는 기록이 있다. 바로 전복에 관한 기록이다.
“울산 전복은 달고 연해서 유명하다.”68)
달고 연한 울산 전복은 오랫동안 진상되었다. 뛰어난 품질을 가진 전복이었지만 이 전복을 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바로 제주 해녀를 초빙하기로 한 것이다.
♣ 제주 사람과 군인의 손을 통해 진상된 울산 전복
제주 해녀가 울산에 온 것은 1749년 이전이었다. 영조 25년이었던 1749년 발간된『학성지』에는 제주도 해녀가 울산으로 이주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69) 이후 제주 해녀는 오랫동안 울산과 제주를 오가며 울산의 바다를 누볐다. 그들이 울산에 온 목적은 단순 명확했다.
‘울산의 좋은 전복을 캐시오.’
제주 해녀들은 지금으로 치면 파견기술자가 돼 울산의 바다를 누볐다. 울산은 품질이 좋은 전복이 자랐지만 전복을 캐는 기술이 좋지는 못했다. 과거의 전복은 모두 자연산이었다.
전복은 온전히 사람의 손을 통해서만 밥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만큼 숙련된 기술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술력은 얼마든지 외부에서 공급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전복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관의 의지가 음식의 정체성과 발달에 미친 영향이 큰 것이다.
설상가상 전복은 계절과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여름 진상이 특히 어려웠다. 중종 29년인 1534년 8월 11일에는 울산 앞바다에 적수 현상이 일어났다. 독으로 인해 물고기가 죽어 떠오르자 특별히 조심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또한 정조 1년인 1776년 9월 2일에도 지시가 내려진다.
한 겨울과 여름에는 생복(生腹)과 반건복(半乾腹)을 진상하지 말라는 것이다. 1842년인 헌종 8년 8월 4일에는 전복과 조개가 독으로 썩어 문드러져 진상이 금지되었다. 어떤 경우라도 품질 좋은 전복을 써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철종 14년인 1863년『경상감영계록』에는 독이 발생하기 이전에잡은 깨끗한 건어물을 특별히 가려서 올리라고 지시한다. 얼마나 많은 전복이 진상되었던 것일까. 진상에 바쳐야 할 전복의 수와 종류 등에 대한 기록은 1757년 발간된『여지도서』의 ‘좌도병마절도영’에 남아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 병영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다. 군인들의 병영 생활을 담은 책에 전복 진상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 낯설기만 하다. 이유는 진상에 적합한 전복을 만든 이들이 울산의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진상에 참여한 군인들은 막중한 업무를 담당했다.
한 달 걸러 한 번씩 생복 150개, 숙복 150개를 봉진한다. 반건전복은 정해진 때 없이 봉진하는데 내의원의 공문에 따라 캐는 대로 날마다 봉진하다가 정지하라는 공문이 내려오면 봉진을 정지한다.70)
병영성에서는 울산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복(살아있는 전복)과 삶아 익힌 숙복을 각각 150개 씩 총 300개를 두 달에 한 번씩 진상 했다. 여기에 부정기적으로 반건조 전복까지 추가되기도 했다. 일년에 최소 1,800개 이상의 전복이 진상된 셈이다.
전복 채취 기간이 제한적 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량이 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려 30명의 군인이 전복 진상에 매달렸다.71) 진상에 참여한 군인의 수가 생각보다 많아 놀라울 뿐만 아니라 전복을 말리는 병사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그들은 생사를 건 엄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진상 앞에서 그들의 목숨은 파리보다 못하기도 했다. 전복 진상이 문제가 생겨 부사가 파직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1665년 1월 1일에 도호부사 정승명은 진상한 전복 때문에 파직되었다.
문제는 전복의 색 때문이었다. 색이 흐리고 탁해 진상품으로 부적합 판정을 받아 책임을 물은 것이다. 또 1793년 5월 27일에는 진상하는 마른 전복의 크기가 작아 문제가 되었다. 진상품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전복을 다른 지역에서 사오기도 했다.
이는 한 지역의 특산품을 올리는 진상의 취지에 벗어나는 일이었다. 이처럼 진상품은 자격과 품격, 진상품을 올리는 일은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울산의 전복은 품질이 뛰어났다. 1933년 발간된『울산군향토지』에도 전복이 강동면, 동면, 대현면, 온산면, 서생면에서 나온다고 했다.
울산의 모든 바다에서 전복이 자랐다.72) 전복의 서식지는 전복의 먹이인 미역, 우뭇가사리의 서식지와 같다. 안타깝게도 해안가에 늘어선 공장으로 인해 자연산 전복이 예전 만큼 생산되지 못하고 있다. 울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전복은 잊히고 있다.
울산에서 조차 완도 전복이 비일비재하게 팔린다.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하듯 한 신문에서는 “울산과 잣과 전복. 지금은 도저히 연결시키려 해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지금 울산의 이미지는 우람한 중공업 공장들이 빼곡하게 들어차고 푸른 작업복을 입고 고동색 작업화를 신은 건장한 아저씨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니 말이다.”73) 라고 했다.
지금은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전복이 최고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 사실을 알리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기도 하다. 여전히 울산의 주전을 중심으로 전복은 생산되고 있다. 주전의 전복은 단단해서 맛이 좋다.
주전 앞바다는 물발이 세고 그러니까 전복은 여기 거가 최고 좋다. 물발이 센데, 전복이 이래 먹으면 단단하고 여물고 맛이 있고, 물살이 약한데 거는 살이 물렁물렁하고 그렇지. 물발이 세니까 전복이 돌에 단단하게 붙어 있을라고 단단하고 그렇지.74)
ID | |
PW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