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와 품질을 자랑하는 울산 미역
천 년. 생각만 해도 아득한 시간이다. 미역은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이 긴 시간을 울산과 함께 했다. 천 년 이상 울산의 밥상에서 울산 사람의 배를 든든히 채웠다. 미역은최고(最古)로 오래된 최고(最高)인 울산의 식재료이다.
울산 미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54년 완성된『세종실록지리지』이다. 이 기록에서 고려의 개국 공신 박윤웅에게 미역바위가 내려졌다고 소개한다. 울산 호족 박윤웅은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웠다. 이 은혜를 잊지 않은 왕건이 박윤웅에게 미역밭을 내린 것이다.
이 미역밭은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윤웅 일가의 소유이다.58) 미역은 박윤웅 바위가 있는 강동면에서 최남단인 서생면까지 생산되었다.59) 이 미역은 최상품으로 인정받으며 오랫동안 진상되었다.60) 천년의 역사를 품은 미역이 현재도 생산, 판매중이다.
울산의 해안이 거센 공업화의 물결에 휩쓸릴 때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래된 것, 유명한 것에는 분명히 그 이유가 있다. 재료를 넉넉히 쓴다든가 요리에 들이는 공이 대단하다든가. 천 년을 이어온 미역이 명성을 유지하는 비법은 무엇인가.
울산 미역은 자연산이라고는 하지만 숙련된 기술로 만들어진다. 울산의 미역 농사는 매년 10월경 시작된다. 미역 농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약용은 미역 농사의 고충을 상세히 기록한다. 미역은 다른 해초보다 비와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고, 미역을 캐는 작업도 어렵다고 했다.
정약용의 걱정대로 미역을 따러 갔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 1710년인 숙종 36년 10월 27일 울산의 한 여성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온양에 살던 정여성(鄭汝成)의 딸 소근련의 이야기였다.
15세인 소근련은 어머니와 함께 미역을 따러 갔다가 어머니가 물에 빠지자 따라 죽었다.61) 당시 왕이었던 숙종은 소근련에게 효행을 위로하는 상을 내린다. 숙종은 사후약방문이 아니라 또 다른 소근련이 나오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했어야 한다.
이를테면 한 겨울에는 미역을 먹지 않겠다는 지시를 내리거나 미역을 캐지 말라는 등의 구체적인 법을 시행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전복을 캐고 한추위에 미역을 채취하느라 남자와 부녀자가 발가벗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 떨면서 물결에 휩싸여 죽지 않은 것만도 참으로 요행이며, 해안에 불을 피워놓고 바다에서 나오면 몸을 구워 피부가 터지고 주름져서 귀신처럼 추한데 겨우 몇 개의 전복을 따고 어렵게 몇 줌의 미역을 따지만 그 값으로는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62)
어렵게 미역을 따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충분하지 않았다. 울산사람들은 불충분한 대접을 받았지만 묵묵히 미역 농사를 지었다. 울산 미역은 하늘이 내린 날씨, 울산 사람의 숙련된 농사 기술 등으로 만들어져 최고로 인정받는다.
천년 동안 나라의 이름과 주인이 바뀌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달라지더라도 울산 미역의 위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느 시대이든 울산 미역은 최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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