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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4. 고래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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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마음 놓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고기, 고래고기

1906년 부산에 사는 신성삼은 일본 포경회사의 통역을 맡았다. 통역이 본업이었지만 다른사람과 달리 수익을 얻는 것이 있었다. 바로 고래 뼈에 붙은 고기를 팔았던 것이다. 그는 이로 적지 않은 수익을 얻었다.28) 뼈에 붙어있는 고래고기의 부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오베기, 우네 등과 같은 설명은 없다. 다만 그것이 팔려서 소득을 올렸다는 점을 적고 있다. 1918년 “소고기보다 싸고 맛있는 고래고기”라는 기사가 보인다.29)

장생포의 결혼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 었다. 소고기를 주는 집과 고래고기를 주는 집으로 말이다. 이 기준은 가정 형편이었다. 가정 형편이 좋은 집에서는 소고기를 결혼식에 썼지만 그렇지 않은 집은 고래고기를 주었다. 그만큼 고래고기는 샀다.

고래고기가 헐값에 팔린 이유는 잡히는 양에 비해 보관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300여 명이 넘는 인부들이 밤낮으로 일해도 장생포항으로 들어오는 고래의 공급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수요는 제한적이었지만 공급은 무한이었다. 고래고기가 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덕분에 울산 사람들은 허기진 배를 달랠 수 있었다. 고래고기는 울산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먹을거리 였다. 고래고기는 단백질이 충분했다. 단백질은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양분이었다. 콩으로 흡수할 수 있는 단백질은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고래고기는 신세계였다. 저렴한 가격, 색다른 맛, 충분한 영양분. 고래고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장생포의 고래고기는 부산, 경주, 대구 등으로 팔려나간다. 상인들은 고래고기를 삶아주는 집, 일명 고래막에서 삶은 고래를 가져다 팔았다.

우리 친구 할아버지 때부터 고래 삶는 집을 했어. 고래를 삶아만 주는 거야. 밤새도록 삶아가 새벽에 건져가 이고 첫차를 타고 부산으로 경주로 가는 거야. 고래 장사들이 각자가 팔러 가고.30)

고래막에서 밤새 삶아진 고래는 다양한 유통 과정을 통해 거쳤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가장 쉽게 볼수 있는 것이 반티(다라이) 장사였다. 그들은 반티에 덩이로 된 고래고기를 이고 다녔다.31) 그들의 반티에 사람들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이 파는 고래고기의 품질을 의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잊힐 만하면 고래고기 장수가 왔다. 이 사람이 오면 아이들은 ‘서울내기 다마내기(양파) 맛좋은 고래고기’라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그 손수레 주변에 모였다. 고래고기는 값도 비쌌고 생필품은 아니엇기 때문이지 고래고기 장수들은 노래를 부르며 호객행위를 했다.

가사는 기억나지 않는데 내용은 ‘고래고기 맛좋은 고래고기, 열두 가지 맛이 나는 고기’라고 자랑하던 것이 생각이 난다. 당시 우리 동네에서 보는 고래고기는 얼음도 없이 파느라 변질하여 역한 냄새도 나고 비린내도 심해 찾는 이가 없었다.

요즘 장생포에 가면 고래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싱싱한 고래고기는 정말 맛있는 부위가 많다. 12가지 맛이 난다는 이야기는 거기 가야 실감할 수 있다.32)

대구에서 고래고기 장사를 만난 필자는 ‘역하고 비린내’ 나는 고래고기라고 하고 있다. 물론 그가 고래고기의 맛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울산에서 먹는 고래고기가 신선하고 맛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1951년 장생포에서 고래고기 가게가 영업을 시작한다.

한국에서 영업 중인 몇 안 되는 오래된 식당으로 널리 알려진 〈원조 할매집〉이다.33) 이후 1980년대 중반 장생포에는 고래고기를 파는 횟집 40여 곳이 즐비했다. 하루에 300~400여 명이 장생포를 찾아와 고래고기를 즐겼다.34)

고래고기가 맛이 있다는 입소문은 한 번쯤 고래고기를 먹어보고 싶게 만든다. 1951년 10월에 육군 제23병원에서 간호장교로 근무하던 현 예비역 중령 조귀례의 글이다.

자나 깨나 먹을 것에만 신경이 쏠려 있던 차에 울산에서 가까운 장생포 유지 한 사람이 고래고기를 대접하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장생포가 고래잡이로 유명하 곳인 줄도 몰랐다.

아무도 그걸 먹어 본 일이 없어 어떤 음식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생선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모두들 몰려갔다. 주말 일과가 끝난 직후였을 것이다. GMC 트럭을 타고 가서 잘 얻어먹었다. 맛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오랜만에 배불리먹은 기억이 난다.35)

전시 상황에서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낀 글이다. 고래고기는 이처럼 다양한 기억들을 만들어내며 사람들의 삶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장생포에서 고래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무조건 찬사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향’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이 향 때문에 고래고기는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다. 처음 먹었을 때 맛이 있다고 생각되면 계속 찾게 된다.36) 간혹 운이 없을 때는 고래고기를 먹고 탈이 나기도 했다. 양명학 명예교수는 판매 과정에 생긴 문제라고 봤다.

(반티 장사가) 삶아서 이고 시장에 갔다가 못 팔면 다시 가져와서 다시 삶아서 다시 시장에 가고, 그 다음날 못 팔면 다시 삶아서 또 나고.37)

반티 장사들은 고래고기가 팔릴 때까지 팔았다. 투철한 직업의식이 돋보이지만, 먹을거리를 유통하는 상인으로서 가져야 할 윤리의식은 희박했던 것이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는 의견도 있다. 허영란은 고래고기의 유통 과정에서 생긴 문제로 접근하지 않았다. 고래 회충 때문에 복통을 일으켰다고 보았다.38)

1986년 고래고기는 자신의 가치를 높일 하나의 사건을 만나게 된다. 고래를 잡는 일이 금지된 것이다. 포경 금지는 울산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더 이상 살아있는 고래를 먹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선을 잡아서 회로 만들어 먹는 한국의 문화와 이미 죽은 고래를 먹어야 하는 문화가 충돌했다.39) 이후 고래고기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면서 가격이 급상승하고 그로 인해 수요마저도 위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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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부산광역시농업기술센터 •우리음식연구회 •제주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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