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포는 예로부터 울산을 대표하는 어항으로 많은 물고기가 잡히던 곳이었다. 그와 관련한 옛이야기가 적잖다. 예전에 아버지를 잃고도 묘 터를 찾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좌절하고 있던 그에게 지관이 다가와 삼일 만에 부자가 될 묘 터를 추천해준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지관이 추천해준 곳에 아버지를 모신다. 삼우제를 지낸 어느 날, 그의 앞에 청어 떼가 밀려온다. 이 사람은 청어 떼를 팔아 삼백 석 부자가 되었다.]
그곳이 장생포의 훙성구만이다. 장생포는 다양한 해산물과 물고기가 풍성하게 나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장생포가 새로운 먹을거리의 등장으로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바로 고래고기와 우뭇가사리 이다.
♣ 장생포의 힘
장생포의 한초등학교에서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한 번, 두 번, 세 번. 학생들은 수업보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뱃고동이 울리는 횟수가 포경선이 잡아온 고래의 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마리면 한 번. 두 마리면 두 번. 뱃고동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아이들의 눈빛은 빛났고 엉덩이는 들썩거렸다. 그들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포구로 몰려든다. 꼬리에 밧줄을 건 고래를 둘러싼 어른들 틈을 헤치고 아이들이 자리를 잡는다.
그들의 눈에 비친 고래, 고래가 잡힌 그 날, 장생포는 축제가 시작된다. 양명학 울산대 명예교수가 기억하는 고래잡이 풍경 이다. 고래는 장생포의 힘이었다. 최근 로또에 열광하는사람들이 많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울산에는 이 로또가 바다에 있었다. 고래는 바다의 로또라고 불린다. 포경 금지로 고래를 잡는 것은 불법이지만 죽은 고래나 스스로 밀려온 고래는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고래가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준 이야기는 옛날부터 있었다.
울산의 평범한 사람들이 풀어낸 옛이야기 속에는 고래를 잡아 부자가 된 이야기가 있다. 동구 주전동에 살던 한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고래에게 먹히고 만다. 고래 배 속에서 절망하던 어부는 가지고 있던 칼로 고래를 찔러 죽인다.
해안가로 밀려온 고래를 팔아서 강동에 물길이 좋고, 물이 잘 빠지지 않는 논을 다섯 마지기를 샀다고 한다. 그 논을 고래논이라고 한다.25) 고래는 예나 지금이나 로또이다. 고래로 장생포를 기억하게 된 것은 120년이 넘는다.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태평양 어업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 시초였다. 러시아에 의해 고래잡이가 본격화되면서 일본의 포경회사도 가담했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장생포에서 잡힌 고래의 대부분은 일본에 수출되었다. 국내에서는 일부만이 소비되었다.26)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고래잡이는 최대 호황을 누린다. 1937년 11월『동아일보』에 따르면 장생포항 부근에서 고래잡이에 관여하는 어민이 8백여 명에 이르고 3백여 명의 인부들이 밤낮 없이 고래를 해체하는 장관을 이루었다고 할 정도로 장생포를 거점으로 한 포경업은 발전을 거듭했다.27)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고래가 정말로 크다’일 것이다. 그래서 ‘고래 등심 크기도 하다는 사진의 제목이 공감된다.
이 큰 고래는 어떻게 소비 했을까 고래를 잡는 목적은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서 였다. 고래는 음식은 아니었다. 고래의 고기만을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고래가 기름이라는 점이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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