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미나리는 언양읍성 안, 즉 돈밖들 미나리, 새치나무거리 등 여러 곳에서 자랐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 언양읍성 안에서 자라는 미나리이다. 이 미나리는 화장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자란다.
지금도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하다. 노지에서 생산되는 미나리는 바로 옆 도로에서 판매된다. 생산, 수확, 판매까지 같은 지역에서 이뤄지는 만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싱싱하다. 언양 읍성 북쪽에서 언양미나리를 판매하는 상인의 자신감은 대단하다.
우리 미나리가 최고야. 언양 내에서도 우리 미나리가 최고다. 우리 물은 다르거든5)
물이 다른 언양미나리 중에서도 최고의 미나리를 생산한다는 상인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하지만 그 역시 점점 약해지는 언양미나리의 입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 지역에는 3~4곳의 농가만이 미나리 농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언양미나리의 생산량은 급감했다. 언양미나리의 재배 면적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부터 이다. 이 시기 언양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남쪽을 제외한 전 지역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언양의 변화를 이끈 것은 동쪽에 생긴 경부고속도로였다.
논밭과 미나리꽝이 있던 곳에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졌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전 구간이 개통된다. 경부고속도로는 언양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접근성이 크게 좋아진 언양에 큰 공장이 들어온다.
언양의 서쪽에 봉제 공장인 삼도물산이 들어섰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 이듬해인 19기년 11월 12일부터 생산 활동을 시작했다.6) 2천여 명이 넘는 근로자가 종사할 정도로 큰 공장이었다. 언양 읍성 북쪽 밤밭 등도 변화한다.
1968년경 누에고치 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견사공장인 언양잠사주식 회사가 들어섰다가 1978년에 조선견직 (주)언양공장으로 바뀌어 1990년대 초반까지 운영되었다.7) 언양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 과정에서 언양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언양 사람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들의 자랑이던 미나리꽝을 메워 나간다. 이런 언양의 변화를 안타깝게 바라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 소설가였던 오영수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고향 언양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려내기를 즐겼다. 언양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낀 감정을 1976년「실향」이라는 글에 담아냈다.
“왜 저, 밤밭등 있잖아. 봄, 여름, 가을할 것 없이 소를 몰고 올라가서 잔디밭에 딩굴면서 씨름도 하고 콩서리며 밀서리며 해 먹고 놀던 놀이터 말야. 그게 몽땅 꼬치() 공장이 차지해 버리고, 옴동도 고속도로에 먹혀버렸어. 새치나무거리 미나리강도, 붕덤이 역터도 거의 다 메워졌고 송대 앞으로 큰길이 나서 석남사(石南寺)까지도 버스가 다니네. 그리고 말이다. 공장이 세 개나 섰네. 옛날 고향이 아니라니까.”8)
그는 “옛날고향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의 눈에 잠사공장은 어린 시절을 즐겁게 보냈던 놀이터를 차지한 것으로, 경부고속도로는 소중한 땅을 먹어버린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미나리꽝이 메워지고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언양미나리의 재배 면적이 급감하면서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언양미나리는 산전미나리와 평산미나리가 사라져간 수순을 밟을 것인가. 언양미나리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언양미나리를 위협하듯 언양을 병풍처럼 둘러싸던 공장들은 언양을 떠난 지 오래다.
공장들이 사라질 때에도 언양미나리는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 언양미나리가 추운 겨울에도 조금씩 자라는 겨울 미나리 인 것처럼 어떤 위기에도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최고의 궁합인 짝을 만났기 때문이다. 바로 언양불고기 이다. 언양불고기가 있는 한 언양미나리는 사라질 수가 없다. 언양미나리는 언양불고기를 먹을 때 반드시 함께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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