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4월 5일
•대표음식 : 쑥떡, 쑥탕 등
한식은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로 음력으로 2월 또는 3월에 드는데 양력으로는 4월 초순으로 이날 성묘를 가거나 나무를 심습니다. 본래 한식은 글자 그대로 더운 음식을 피하고 찬 음식을 먹는 날이라 하여 ‘찬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한식’(寒食)이라 하였습니다.
한식의 유래에는 세가지 설이 전해집니다. 첫 번째로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매년 봄에 나라에서 새 불(新火)을 만들어 새 불을 만들어 쓸 때, 그에 앞서 묵은 불을 일체 금지하던 예속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묵은 불은 새 불을 받기 전에 꺼두어야 하는데 새 불이 대궐에서 관아를 거쳐 일반가정집에 이르려면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찬밥을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한식 무렵은 비가 적고 건조한데다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불이 나기 쉬운 때여서 세종대왕은 금화도감을 설치해 관리들에게 마을을 돌면서 백성들이 불을 쓰지 않게 지도하라고 했습니다. 나라에서 불을 쓰지 못하게 하니까 미리 밥을 해두었다가 찬밥을 먹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개자추 전설(介子推 傳說)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중국 춘추시대에 개자추란 신하가 진나라 문공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버지 헌공에게 추방되어 망명생활을 할 때 19년 동안 문공을 충성을 다해 모셨습니다. 이 후에 문공이 왕위에 오르고 많은 현신들을 등용하였으나, 개자추는 봉록을 받지 못하고 오히여 간신으로 몰려 면산에 숨어 살았습니다.
문공이 나중에 개자추의 충성을 알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산에서 나오기를 아무리 권해도 나오지 않자 개자추를 나오게 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도 그가 내려오지 않자 산에 올라가보니 늙은 홀어머니와 함께 버드나무에 몸을 묶어 불에 타 죽어 있었습니다. 그 뒤 문공은 크게 슬퍼하여 그를 애도하는 뜻으로 이 날은 불쓰기를 금하였고 찬 음식을 먹게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이 날을 냉절(冷節)이라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한식이 대표적 명절의 하나로 숭상되어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금형을 실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더욱 그 민속적 권위가 중시되어 민간에서는 설, 단오, 추석과 함께 한식을 4대명절로 여겨 제사를 올렸습니다. 궁중에서는 여기에 동지를 더해 오절사라 하여 제사를 지내며 향연을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내병조에서는 버드나무를 뚫어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고 그 불을 홰에 붙여 각 관아와 모든 대신 집에 나누어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즉 조선시대에 있어서 한식은 조상을 위한 제례와 환절기 불조심을 위한 금화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식에는 찬음식을 먹는 이유로 메밀국수를 별식으로 먹었습니다. 이것을 ‘한식면’이라고도 합니다. 한식 무렵은 농사일이 바쁜 때라 추석이나 설날처럼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아 농민들은 구황작물을 이용한 음식을 먹곤 했습니다.
메밀은 가물어서 일반작물의 재배가 어려울 때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므로 예부터 구황식량으로 이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함경도와 강원도가 유명합니다. 메밀은 주로 가루로 만들어 냉면이나 막국수, 수제비 등으로 먹었는데, 조선시대에 면은 대부분 메밀로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옛날에는 밀재배가 일반화되지 않아 밀가루가 귀하므로 면을 만들 때 주로 메밀가루나 녹말가루를 이용했습니다. 따라서 밀가루는 진말(眞末)이라 하고, 메밀가루는 목말(木末)이라 하는데, 메밀가루는 반죽을 하면 끈기가 없어 나뭇가지처럼 뚝뚝 끊어지므로 익반죽 하여 바로 먹어야 하는 단점이 있는 반면, 밀가루는 찬물로도 반죽이 잘되고 식간이 지날수록 끈기가 생겨 그 맛이 더 좋아지기 때문에 진짜 국수 맛을 내는 가루라 하여 진가루라 불렀다고 합니다.
옛 풍습에 결혼식이나 잔치가 있을 때 지금과 달리 곡식이나 음식으로 부조를 하였는데, 이때 가장 많이 부조하는 음식이 메밀국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메밀국수는 밀국수와 달리 가격이 저렴하고, 삶아도 잘 불지 않아 잔칫날 손님을 접대하기 좋을 뿐 아니라 국수의 모양이 길게 이어져 좋은 일이 길게 이어지기를 염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