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 배추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타난 문헌은 13세기경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 고려 고종 때 발간된 ‘향약구급방’에 원시형 배추를 뜻하는 숭(菘)이란 표현이 나오며 약용으로 쓰였으며 13세기 경 재배됨을 의미
○ 조선시대 문헌인 ‘훈몽자회(訓蒙子會, 1527)’에는 중국에서 도입된 무역품의 하나로 숭채 종자가 포함되어 있음을 기록
- 이후 중종, 순조 때에도 중국으로부터 숭채 종자가 수입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국내 종자생산이 어려웠음을 시사
* 정조 때의 실학자 박제가는 ‘배추는 북경에서 종자를 가져다 심어야 좋은 것이 생산되고 농가에서 채종한 종자를 3년 계속 심으면 순무가 된다’고 기록
○ ‘한정록(閑情錄, 1610년 경)’ ‘치농편’에 숭채와 함께 배추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7~8월 파종한다고 기록
□ 현재의 배추는 중국에서 도입된 반결구 배추가 토착화되면서 탄생한 ‘개성배추’가 원조
○ 1800년대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채소재배 기술이 가장 앞선 개성을 중심으로 재배
- 1900년대 재배가 많았던 서울지방으로 옮겨지면서 개량된 ‘서울배추’가 탄생하며 중부 이북의 개성배추와 쌍벽을 이룸
1900년대의 몇 가지 의미 있는 기록들
▷ 1931년 발간된 ‘조선총독부농업시험장 25주년기념지’에서 재래배추 중 유명한 것은 경기도 개성의 개성배추와 경성의 경성배추 2품종이라 기록
- 1923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시내에서 중요히 치는 배추밭은 방아다리(충신동), 훈련원(동대문내), 구리안뜰(동대문밖), 섬말(종로통오정목)인데 개성배추는 수해로 전멸하고 쓸 만한 방아다리배추는 각 대가에서 사드리기 시작했다’고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