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은 늘 황제(黃帝)와 기백( 伯)에 대하여 말한다. 황제와 기백은 변천하는 자연현상에 정통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책쓰기를 힘들어 했으나 그래도 묻고 대답하여 해명(解明)하는 식으로 써서 후대(後代)들에게 전하였으니 의학책이 나온 지는 이미 오래라고 말할 수 있다.
옛날 태창공(太倉公)과 진월인(秦越人)으로부터 그후 유하간(劉河間), 장자화(張子和), 주단계(朱丹溪), 이동원(李東垣)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의학자(醫學者)들이 연이어 나와서 의학이론은 더욱 복잡하게 만들 어졌다.
한편 경전(經典)의 구절을 따다가 각기 다투어 자기의 학파를 내세움으로써 의학책은 더 많아졌으나 의술은 더욱더 애매해졌다. 그리하여『영추(靈樞)』의 본래의 뜻과 거리가 멀어졌다.
서투른 의사들은 깊이 이치를 알지 못하고 혹『내경(內經)』의 말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거나 옛날 방법에만 매달렸을 뿐이지 변통(變通)해서 쓸 줄을 몰랐다. 또 취사선택해서 그 중심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려고 하다가 드디어 죽이는 일이 많았다.
선종왕(宣宗王)은 몸조리를 하는 방법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의학에 관심을 두고 백성들이 병으로 앓는 것을 걱정하여 병신년(1596년)에 태의(太醫)로 있던 허준(許浚)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즘 조선이나 중국의 의학책들은 모두 변변치 않고 보잘 것이 없는 초록(抄錄)들이므로 그대는 여러가지 의학책을 모아서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사람의 병은 다 몸을 잘 조섭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므로 수양하는 방법을 먼저 쓰고 약과 침, 뜸은 그 다음에 쓸 것이며 또 여러 가지 처방이 번잡(煩雜)하므로 되도록 그 요긴한 것만을 추려야 할 것이다.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일찍 죽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약초가 많이 나기는 하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 이를 분류 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허준(許浚)은 유의(儒醫) 정작(鄭 )과 태의(太醫) 양례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례 남(鄭禮男) 등과 함께 편집국(編輯局)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대략적인 체계를 세웠을 때 정유년(丁酉年) 난리를 만나 의사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편찬은 할 수 없이 중단되었다. 그 후 선종왕이 또 허준에게 혼자서 편찬하라고 하면서 국가에 보관하였던 의학책 500여 권을 내주면서 참고하라고 하였다.
편찬이 아직 절반도 못 되었는데 선종왕은 세상을 떠났다. 새 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경술년(庚戌年, 1610년)에 비로소 이 사업이 끝났다. 이 책의 이름을『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지었으며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곧 왕에게 보이니 높이 평가하면서 말하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은 일찍이 선종왕에게서 의학 책을 편찬하라는 특명을 받고 여러해 동안 깊이 연구하였다. 심지어는 옥중과 유배살이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열매로 지금 편찬을 끝냈다.
생각하면 선종왕이 편찬할 것을 명령한 책이 내가 왕위에 오른 때 끝내었으니 비감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허준에게 좋은 말 한 필을 주면서 그의 공로(功勞)를 표창(表彰)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급히 내의원(內醫院)에 명령하여 출판청(出版廳)을 설치하고 인쇄하여 국내외에 널리 배포하라고 하였다. 제조(提調)로 있던 이정구(李 廷龜)에게 서문(序文)을 써서 책머리에 싣도록 명령하였다.
정구는 생각하건대 원기(元氣)가 한번 흩어 지고 6기가 조화되지 못하면 여러 가지 병이 생겨서 백성들이 화(禍)를 입게 되는데 의약품(醫藥品)으로 죽어 가는 환자를 구원(救援)하는 것은 실로 정치에서 첫째가는 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의술(醫術)은 책이 아니면 기재할 수 없으며 책은 잘 선택하지 않으면 자세하게 쓸 수 없고 폭 넓게 수집하지 않으면 그 이치(理致)가 명료하지 못하며 널리 배포하지 않으면 혜택이 널리 미치지 못한다.
이 책은 옛날이나 지금의 의학책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였고 여러 사람의 이론을 절충하여 기본을 찾아서 근원을 해명하였으며 강령(綱領)을 세우고 요점을 따서 자세하면서도 간결하며 간결하면서도 빠진 것이 없다.
내경(內景)과 외형(外形) 편으로부터 시작하여 잡병(雜病)의 여러 가지 처방에 이르기까지 분류하였으며 맥결(脈訣), 증후론(症候論), 약성(藥性), 치료법(治療法), 섭생(攝生)에 대한 요점과 침과 뜸에 대한 모든 규범(規範)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다 써놓았다.
그리고 체계가 정연하여 복잡한 것이 없으므로 환자의 증상이 비록 천백(千百)가지라 할지라도 치료에서 보(補)하고 사(瀉)할 것과 빨리하고 늦게 하는 것 등이 모두 폭넓고 적절하게 응용되도록 써놓았다.
구태여 옛날 고전(古典)이나 근래의 여러 학설을 광범히 참고하지 않아도 병증(病症) 분류(分類)에 따라 처방을 찾으면 여러 가지를 다 알 수 있다. 그리고 증상에 따라서 약을 쓰면 꼭 들어맞는다.
진실로 의사들에게는 보배로운 거울이며 백성들을 구원하는 좋은 법으로 될 것이다. 이것은 모두 선종왕이 가르쳐 준 묘책이고 현재의 왕이 계승한 높은 뜻이다.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만물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과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이기 때문에 잘하는 정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진 사람이 마음을 쓰면 그 혜택이 널리 미친다”고 하였으니 과연 그렇다고 할 만하다. 만력(萬曆) 39년 신해년(辛亥年) 4월에 숭록대부(崇祿大夫) 행이조판서(行吏曹判書)겸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지(大 學知) 경연(經筵)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인 이정구(李廷龜)는 왕의 가르침을 받들고 삼가 서문(序文)을 쓴다.